* 철학 아카데미 <처음 읽는 현대철학> 위-디오니시우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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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디오니시우스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인물인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로 처음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여러 연구 결과, 그가 바울과는 한참 떨어진 5~6세기에 살았던 인물이라는 추정들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여전히 그의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앞에다 거짓 위(僞)를 붙여 위-디오니시우스라고 불렸습니다. 이러한 가명을 붙여가면서까지 그를 주목하는 건, 그가 남긴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유출과 회귀'에 대한 그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영향을 미쳤고, 그의 신비 사상은 에크하르트를 포함한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위-디오니시우스에 대해서 알아보고려고 합니다.
■ 디오니시우스의 배경,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
신플라톤주의의 존재론은 원류와 유출, 회귀를 중심으로 설명됩니다. 가령 플로티노스 편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세계는 일자-누스-영혼-세계의 순으로 유출되어 발생합니다. 여기서 유출이라는 것은 각 단계마다 '머묾'과 '멈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자와 세계의 관계는 이 세 가지의 순환으로 설명되는데, 이를 '삼원체적 순환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는 초기 교부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교리들을 설명하는 도구로 활용되는데요, 문제는 신플라톤주의의 '유출과 회귀의 순환론'이 그리스도교의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와 상충된다는 게 뒤늦게 인식되었다는 점입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하여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충돌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비주의'입니다. 이처럼 디오니시우스의 철학(혹은 신학 체계)은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신비주의, 그리고 뒤에서 살펴볼 상징주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디오니시우스, 신비사상
신비란 감춰져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신비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이해합니다. 곧 그에게 있어 철학에서의 일자,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으로 표현되는 궁극적 실재는 인간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신비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비주의는 궁극적 실재를 향한 인간의 지향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신비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는데요, 그의 저작인 <신비신학>에서 앞서 언급했던 삼원체적 순환을 계시에 차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비추임(원류)은 예비된 존재들을 향하여 다채롭게 흘러나오지만(유출), 그럼에도 그 자체 안에 단순하게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비추임 받은 자들을 하나로 연합(회귀)시킨다."라고요. 이를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다양한 존재들에게 비춰지며, 그 비춰짐을 통해 다시 하나님 한분께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디오니시우스는 일자의 영역을 '신비'로 규정하며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출의 과정을 탐색하는 것으로 신을 비유적으로 알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설명한 것이 위 그림의 양 옆에 나온 '하향적 긍정의 길'과 '상향적 부정의 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상징주의'가 등장하는데요, 쉽게 말하면 신의 속성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우리는 신의 신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살펴보겠는데요, 위 그림을 참조하면 더 좋겠습니다.
1) 하향적 긍정의 길
하향적 긍정의 길은, 쉽게 말하면, 아래로 유출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다'라는 긍정의 언명을 통해 그 속성을 상징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오니시오스의 논리를 따라가볼까요. 먼저 삼원체적 순환운동은 철학적으로는 일자, 기독교적으로는 성삼위를 의미하는 '일자의 단계'에서 출발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단계는 인간의 인지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지적 능력은 이러한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일자의 속성으로 간주되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차용합니다. 그리하여 일자 혹은 신이라는 궁극적 실재는 '하나님은 선이다.'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관념의 형태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지성(관념들)의 단계'입니다. 이처럼 관념으로 표현되는 단계를 지나면 조금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언명 등을 통해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우레에 비유하는 것처럼, 형태를 띨 수 없는 신의 속성을 인간이 감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의 기제들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영혼(상징)의 단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래로 갈수록 더 구체적으로 신(일자)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2) 상향적 부정의 길
상향적 부정의 길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언명을 통해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봤던 하향식 긍정의 길이 다양한 상징과 비유들을 낳는 방식으로 내려왔다면, 상향적 부정의 길은 올바른 해석을 통해 그러한 상징을 하나씩 제거해가면서 다시 근원으로 올라갑니다. 쉽게 말해 신의 속성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죠. 이처럼 초월적 근거를 향한 상승은 '부정의 방법'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디오니시우스가 제시하는 신비주의적 해석학의 골자입니다. 이러한 운동이 반복되면 결과적으로 정의와 진리, 아름다움, 선과 같은 순수하고 고차원적인 관념들만 남게 됩니다.
■ 긍정과 부정을 넘어 찬란한 어둠으로
그렇다면 마지막 일자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디오니시우스는 '고차원적 무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인식 구조는 기본적으로 O와 X라는 이원성을 띠고 있지만, 상향적 운동의 최종 목적지인 일자의 영역은 지성의 이원성을 넘어섭니다. 가령 '하나님은 선이시다'라는 긍정의 언명을 부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악이시다'라는 명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존재인 것이죠. 이처럼 지성으로 파악한 관념으로는 초월적 신성 그 자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관념에 대한 앎마저도 포기하는 초지성적인 태도가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고차원적 무지입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나친 밝음이 오히려 눈을 멀게 하여 어둡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디오니시오스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곘습니다. "아무것도 아니 앎으로써 지성을 넘어서 알게 됩니다."라고.
* 철학 아카데미 <처음 읽는 현대철학> 위-디오니시우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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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디오니시우스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인물인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로 처음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여러 연구 결과, 그가 바울과는 한참 떨어진 5~6세기에 살았던 인물이라는 추정들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여전히 그의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앞에다 거짓 위(僞)를 붙여 위-디오니시우스라고 불렸습니다. 이러한 가명을 붙여가면서까지 그를 주목하는 건, 그가 남긴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유출과 회귀'에 대한 그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영향을 미쳤고, 그의 신비 사상은 에크하르트를 포함한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위-디오니시우스에 대해서 알아보고려고 합니다.
■ 디오니시우스의 배경,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
신플라톤주의의 존재론은 원류와 유출, 회귀를 중심으로 설명됩니다. 가령 플로티노스 편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세계는 일자-누스-영혼-세계의 순으로 유출되어 발생합니다. 여기서 유출이라는 것은 각 단계마다 '머묾'과 '멈춤'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자와 세계의 관계는 이 세 가지의 순환으로 설명되는데, 이를 '삼원체적 순환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는 초기 교부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교리들을 설명하는 도구로 활용되는데요, 문제는 신플라톤주의의 '유출과 회귀의 순환론'이 그리스도교의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와 상충된다는 게 뒤늦게 인식되었다는 점입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하여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충돌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비주의'입니다. 이처럼 디오니시우스의 철학(혹은 신학 체계)은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신비주의, 그리고 뒤에서 살펴볼 상징주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디오니시우스, 신비사상
신비란 감춰져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신비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이해합니다. 곧 그에게 있어 철학에서의 일자,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으로 표현되는 궁극적 실재는 인간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신비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비주의는 궁극적 실재를 향한 인간의 지향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디오니시우스는 이러한 신비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는데요, 그의 저작인 <신비신학>에서 앞서 언급했던 삼원체적 순환을 계시에 차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모든 비추임(원류)은 예비된 존재들을 향하여 다채롭게 흘러나오지만(유출), 그럼에도 그 자체 안에 단순하게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비추임 받은 자들을 하나로 연합(회귀)시킨다."라고요. 이를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다양한 존재들에게 비춰지며, 그 비춰짐을 통해 다시 하나님 한분께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디오니시우스는 일자의 영역을 '신비'로 규정하며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출의 과정을 탐색하는 것으로 신을 비유적으로 알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설명한 것이 위 그림의 양 옆에 나온 '하향적 긍정의 길'과 '상향적 부정의 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상징주의'가 등장하는데요, 쉽게 말하면 신의 속성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우리는 신의 신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살펴보겠는데요, 위 그림을 참조하면 더 좋겠습니다.
1) 하향적 긍정의 길
하향적 긍정의 길은, 쉽게 말하면, 아래로 유출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다'라는 긍정의 언명을 통해 그 속성을 상징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오니시오스의 논리를 따라가볼까요. 먼저 삼원체적 순환운동은 철학적으로는 일자, 기독교적으로는 성삼위를 의미하는 '일자의 단계'에서 출발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단계는 인간의 인지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지적 능력은 이러한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일자의 속성으로 간주되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차용합니다. 그리하여 일자 혹은 신이라는 궁극적 실재는 '하나님은 선이다.'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관념의 형태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지성(관념들)의 단계'입니다. 이처럼 관념으로 표현되는 단계를 지나면 조금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언명 등을 통해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우레에 비유하는 것처럼, 형태를 띨 수 없는 신의 속성을 인간이 감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의 기제들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영혼(상징)의 단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래로 갈수록 더 구체적으로 신(일자)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2) 상향적 부정의 길
상향적 부정의 길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언명을 통해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봤던 하향식 긍정의 길이 다양한 상징과 비유들을 낳는 방식으로 내려왔다면, 상향적 부정의 길은 올바른 해석을 통해 그러한 상징을 하나씩 제거해가면서 다시 근원으로 올라갑니다. 쉽게 말해 신의 속성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죠. 이처럼 초월적 근거를 향한 상승은 '부정의 방법'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디오니시우스가 제시하는 신비주의적 해석학의 골자입니다. 이러한 운동이 반복되면 결과적으로 정의와 진리, 아름다움, 선과 같은 순수하고 고차원적인 관념들만 남게 됩니다.
■ 긍정과 부정을 넘어 찬란한 어둠으로
그렇다면 마지막 일자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디오니시우스는 '고차원적 무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인식 구조는 기본적으로 O와 X라는 이원성을 띠고 있지만, 상향적 운동의 최종 목적지인 일자의 영역은 지성의 이원성을 넘어섭니다. 가령 '하나님은 선이시다'라는 긍정의 언명을 부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악이시다'라는 명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존재인 것이죠. 이처럼 지성으로 파악한 관념으로는 초월적 신성 그 자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관념에 대한 앎마저도 포기하는 초지성적인 태도가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고차원적 무지입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나친 밝음이 오히려 눈을 멀게 하여 어둡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디오니시오스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곘습니다. "아무것도 아니 앎으로써 지성을 넘어서 알게 됩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