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아카데미 <처음 읽는 현대철학>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편

■ 들어가기
이번에 함께 공부한 중세철학의 인물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업적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체계화한 일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마니교나 당대 그리스도교와 갈등했던 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이교적, 이단적 사설와 교리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을 구해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았던 도구는 신플라톤주의였습니다. 그는 신과 인간 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플라톤주의의 내재석 특성을 반영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 지은 죄를 강조했던 펠라기우스와 달리 아담에서 기인한 원죄를 강조했고, 영과 육을 구분한 후 영의 우선성을 강조했으며, 자유의지를 행하는 데 있어 신의 은총을 강조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본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생각해보기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지금의 이야기들이 굉장히 익숙할 겁니다. 좋게 말하면 시대를 초월할 만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굉장히 잘 정돈되었다는 의미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가 짜놓은 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겁니다. 저는 여기서 후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체계가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서 말이지요.
오늘날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하여 다양한 비판점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초기 기독교의 맥락과 더불어 설명의 도구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야 더 정당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달리 보면, 해석학이 발달하고 설명의 도구가 다양해진 상황에서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주요하게 따르는 게 맞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합니다. 가령 철학에서의 중요한 전회는 과학의 발전에서 기인했습니다. 뉴턴역학과 양자영학이 등장하면서 이전 철학 체계를 뒤엎는 새로운 철학적 흐름이 발생한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현대에 살았다면 다른 이야기들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 규정한 닫힌 개념들에 대하여 보다 열린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이나 믿음, 초월성, 신론, 기독론 등은 닫힌 개념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눈에 보이는 예배와 기도에 대해서도 정의와 규정, 이해와 해석이 모두 다르니까요. 해석학의 도구가 발전한 시대에서도 여전히 신플라톤주의를 빌려온 신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이단이라고 맹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겁니다. 물론 한계와 형태의 경계가 없으면 질서가 무너진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분명 새겨둘만 하겠습니다.
■ 나오기
철학이 가진 여러 힘 중의 하나는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관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가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들은 신학의 복잡성이나 모호함을 이유로 신학이 무용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체계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지적을 일면 맞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태도가 되러 어떤 신학이나 체계로 함몰되는 것을 강하게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사유가 게을러지면 권위주의가 된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경직된 질서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
* 철학 아카데미 <처음 읽는 현대철학>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편
■ 들어가기
이번에 함께 공부한 중세철학의 인물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업적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체계화한 일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마니교나 당대 그리스도교와 갈등했던 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이교적, 이단적 사설와 교리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을 구해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았던 도구는 신플라톤주의였습니다. 그는 신과 인간 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플라톤주의의 내재석 특성을 반영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 지은 죄를 강조했던 펠라기우스와 달리 아담에서 기인한 원죄를 강조했고, 영과 육을 구분한 후 영의 우선성을 강조했으며, 자유의지를 행하는 데 있어 신의 은총을 강조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본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생각해보기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지금의 이야기들이 굉장히 익숙할 겁니다. 좋게 말하면 시대를 초월할 만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굉장히 잘 정돈되었다는 의미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가 짜놓은 판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겁니다. 저는 여기서 후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체계가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서 말이지요.
오늘날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하여 다양한 비판점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초기 기독교의 맥락과 더불어 설명의 도구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야 더 정당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달리 보면, 해석학이 발달하고 설명의 도구가 다양해진 상황에서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주요하게 따르는 게 맞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합니다. 가령 철학에서의 중요한 전회는 과학의 발전에서 기인했습니다. 뉴턴역학과 양자영학이 등장하면서 이전 철학 체계를 뒤엎는 새로운 철학적 흐름이 발생한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현대에 살았다면 다른 이야기들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 규정한 닫힌 개념들에 대하여 보다 열린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구원이나 믿음, 초월성, 신론, 기독론 등은 닫힌 개념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눈에 보이는 예배와 기도에 대해서도 정의와 규정, 이해와 해석이 모두 다르니까요. 해석학의 도구가 발전한 시대에서도 여전히 신플라톤주의를 빌려온 신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이단이라고 맹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겁니다. 물론 한계와 형태의 경계가 없으면 질서가 무너진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분명 새겨둘만 하겠습니다.
■ 나오기
철학이 가진 여러 힘 중의 하나는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관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가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들은 신학의 복잡성이나 모호함을 이유로 신학이 무용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체계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지적을 일면 맞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태도가 되러 어떤 신학이나 체계로 함몰되는 것을 강하게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사유가 게을러지면 권위주의가 된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경직된 질서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