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 아카데미 <처음 읽는 중세철학> 플로티노스 편

■ 들어가기
철학에서 신은 인간의 유한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유의 풍부함을 제한하는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철학은 서양철학사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절적한 평가가 아닙니다. 앞으로 함께 공부하면서 알아보겠지만 중세철학의 내용은 굉장히 풍부했고, 그것의 방법론이나 통찰 등은 근대와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세철학에 대한 평가절하는 근대 계몽주의의 서사에 의해 대상화된 결과에 지나지 않을겁니다. 그런 점에서 중세철학을 통해 사회를 보는 관점들을 한번 발견해보고자 합니다. 그 시작은 플로티노스입니다.
■ 플로티노스,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철학의 연결자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고대 그리스 철학은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듭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대한 구분은 학자마다 다르지만 철학사의 관점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 이후와 중세 이전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시기의 그리스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그리하여 현실적인 삶에 방향을 제시해 줄 실천적인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시대적 혼란과 도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죠. 그중 한 명이 바로 플로티노스입니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어받아 그것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신플라톤주의를 엽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중세철학을 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누군가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플로티노스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셈이죠. 그래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들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철학의 내용은 매우 달랐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사물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사물에 본질에 대하여 플라톤은 현실 너머의 세계에 있다고 봤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내재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1) 플라톤 이해하기: 이원론, 이데아, 형상 분유
플라톤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참된 실재와 현실을 구분하는 '이원론'에 기반합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란 사물들의 참된 실재인 '형상'이 존재하는 곳이고, 현실은 그러한 형상들의 '그림자'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플라톤은 이데아의 현상 혹은 이데아가 '분유'되어 만들어진 세계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플라톤은 이데아와 현실을 엄격히 분리했고, 이데아를 더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 이해하기: 내재, 형상, 질료, 순수 형상, 목적인, 가능태, 현실태
이러한 플라톤의 이원론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이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사물의 본질인 '형상'이 '질료(세계)'에 '내재'되어 있다고 본 것이죠. 여기서 형상은 질료로 하여금 무언가로 변하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그 운동이 목표하는 것을 '목적인'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순수 질료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반복을 통해 최종 목적인인 '순수 형상'에 도달합니다. 쉽게 말하면 질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계속해서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 플로티노스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플로티노스는 시대적인 혼란 속에서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선택했던 설명의 도구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였다면, 그것의 방향은 기독교였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한계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플로티노스가 보기에 플라톤 철학은 엄격한 이원론 때문에 진리와 현실을 연결하지 못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기독교에서 '악'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 완전하고 불변한 일자
먼저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받아들여 변화하거나 증감되지 않는, 그러니까 창조되거나 창조되지도 않는 일자를 상정합니다. - 철학에서 일자는 이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 이 일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운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우리와의 단절된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불변하는 일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세계는 어떻게 창조될까요. 이에 대하여 플로티노스는 '유출'의 개념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일자에 의한 창조가 아니라 일자의 흘러넘치는 생명력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는 거죠.
2) 유출, 정신과 물질
이 세계는 일자에 의한 유출의 정도에 따라 존재 방식이 달라집니다. 유출의 정도가 높으면, 다르게 표현하면 신에서부터 멀어질수록 더 낮은 단계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인간보다 더 유출되면 동물, 동물보다 더 유출되면 식물이 되는 식입니다. 한편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정신과 물질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선 내용과 같은 원리로 정신의 비중이 높을수록 유출의 정도가 적고, 물질에 가까울수록 유출의 정도가 큽니다.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쉽게 도식화할 수 있겠습니다. '신 - 누스(정신, 이성) - 영혼(인간) - 물질(자연)'으로요.
이러한 설명을 잘 들여다보면 어떤 삶이 바람직한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에게 가까워지는 방향이 바람직하고, 반대로 신과 멀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플로티노스는 물질을 향하는 것을 물질 운동으로, 정신을 바라보는 것은 사유 운동이라고 말하며 후자의 운동을 고귀한 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를 도덕적으로 다시 기독교 구원론과 연결합니다. 쉽게 말해 신을 향하는 일이 고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3) 악과 구원
전쟁과 비참이 판치는 시대에서 '선한 신'을 말하는 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왜냐면 기독교의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한 선한 신인데, 그러한 신이 악을 만들었다면 여전히 그 신을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하니까요. 플로티노스의철학은 이러한 악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유출'의 개념을 통해서요. 곧 악은 신의 의지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유출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지요. 구원 역시 사유 운동을 통해 일자와의 합일을 이루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져 더욱 발전됩니다.
■ 플로티노스의 한계
이러한 플로티노스 철학에는 본질적으로 내재된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는 플라톤 철학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데아로부터 분유된 세계를 말하는 플라톤 철학은 필연적으로 위계적인 구조와 질서를 발생시킵니다. 왜냐면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은 고귀하고, 물질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고귀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플라톤은 이데아로 멀어지는 요인을 '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계급과 질서를 공고히 하여 변화를 막는 것이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러한 플라톤의 철학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의 죽음과 연결되었다고 해석합니다. 플라톤의 마음을 우리가 정확히 헤아릴 순 없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한계가 플로티노스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역설적으로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중세의 오랜 역사를 가능하게 했지만 말이죠.
■ 나오기
신과 이데아에 대한 이야기들은 너무나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당대의 혼란한 시대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을 한번 더 상기시킬 필요가 있겠습니다. 현대에는 가치와 전통, 도덕에 대한 해체주의적인 경향들이 존재하고, 그중에는 타당한 지적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고귀함을 지향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쉽게 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인간적인 가치가 사라지고, 사람이 도구화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겠지요. 어쩌면 - 비록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 윤리의 내용을 지키기 위해 신이라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윤리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라는 말로 플로티노스를 정리해보면 어떨까요.
* 철학 아카데미 <처음 읽는 중세철학> 플로티노스 편
■ 들어가기
철학에서 신은 인간의 유한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유의 풍부함을 제한하는 존재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세철학은 서양철학사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절적한 평가가 아닙니다. 앞으로 함께 공부하면서 알아보겠지만 중세철학의 내용은 굉장히 풍부했고, 그것의 방법론이나 통찰 등은 근대와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세철학에 대한 평가절하는 근대 계몽주의의 서사에 의해 대상화된 결과에 지나지 않을겁니다. 그런 점에서 중세철학을 통해 사회를 보는 관점들을 한번 발견해보고자 합니다. 그 시작은 플로티노스입니다.
■ 플로티노스,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철학의 연결자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고대 그리스 철학은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듭니다. 헬레니즘 시대에 대한 구분은 학자마다 다르지만 철학사의 관점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 이후와 중세 이전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시기의 그리스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그리하여 현실적인 삶에 방향을 제시해 줄 실천적인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시대적 혼란과 도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죠. 그중 한 명이 바로 플로티노스입니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어받아 그것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신플라톤주의를 엽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중세철학을 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누군가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선 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플로티노스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셈이죠. 그래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들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철학의 내용은 매우 달랐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사물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사물에 본질에 대하여 플라톤은 현실 너머의 세계에 있다고 봤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내재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1) 플라톤 이해하기: 이원론, 이데아, 형상 분유
플라톤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참된 실재와 현실을 구분하는 '이원론'에 기반합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란 사물들의 참된 실재인 '형상'이 존재하는 곳이고, 현실은 그러한 형상들의 '그림자'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플라톤은 이데아의 현상 혹은 이데아가 '분유'되어 만들어진 세계로 이해합니다. 이처럼 플라톤은 이데아와 현실을 엄격히 분리했고, 이데아를 더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 이해하기: 내재, 형상, 질료, 순수 형상, 목적인, 가능태, 현실태
이러한 플라톤의 이원론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이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러니까 사물의 본질인 '형상'이 '질료(세계)'에 '내재'되어 있다고 본 것이죠. 여기서 형상은 질료로 하여금 무언가로 변하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그 운동이 목표하는 것을 '목적인'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순수 질료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반복을 통해 최종 목적인인 '순수 형상'에 도달합니다. 쉽게 말하면 질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계속해서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 플로티노스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플로티노스는 시대적인 혼란 속에서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선택했던 설명의 도구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였다면, 그것의 방향은 기독교였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한계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플로티노스가 보기에 플라톤 철학은 엄격한 이원론 때문에 진리와 현실을 연결하지 못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기독교에서 '악'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 완전하고 불변한 일자
먼저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받아들여 변화하거나 증감되지 않는, 그러니까 창조되거나 창조되지도 않는 일자를 상정합니다. - 철학에서 일자는 이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 이 일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운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우리와의 단절된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불변하는 일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세계는 어떻게 창조될까요. 이에 대하여 플로티노스는 '유출'의 개념을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일자에 의한 창조가 아니라 일자의 흘러넘치는 생명력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는 거죠.
2) 유출, 정신과 물질
이 세계는 일자에 의한 유출의 정도에 따라 존재 방식이 달라집니다. 유출의 정도가 높으면, 다르게 표현하면 신에서부터 멀어질수록 더 낮은 단계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인간보다 더 유출되면 동물, 동물보다 더 유출되면 식물이 되는 식입니다. 한편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정신과 물질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선 내용과 같은 원리로 정신의 비중이 높을수록 유출의 정도가 적고, 물질에 가까울수록 유출의 정도가 큽니다.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쉽게 도식화할 수 있겠습니다. '신 - 누스(정신, 이성) - 영혼(인간) - 물질(자연)'으로요.
이러한 설명을 잘 들여다보면 어떤 삶이 바람직한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에게 가까워지는 방향이 바람직하고, 반대로 신과 멀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플로티노스는 물질을 향하는 것을 물질 운동으로, 정신을 바라보는 것은 사유 운동이라고 말하며 후자의 운동을 고귀한 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를 도덕적으로 다시 기독교 구원론과 연결합니다. 쉽게 말해 신을 향하는 일이 고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3) 악과 구원
전쟁과 비참이 판치는 시대에서 '선한 신'을 말하는 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왜냐면 기독교의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한 선한 신인데, 그러한 신이 악을 만들었다면 여전히 그 신을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하니까요. 플로티노스의철학은 이러한 악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유출'의 개념을 통해서요. 곧 악은 신의 의지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유출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지요. 구원 역시 사유 운동을 통해 일자와의 합일을 이루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져 더욱 발전됩니다.
■ 플로티노스의 한계
이러한 플로티노스 철학에는 본질적으로 내재된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는 플라톤 철학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데아로부터 분유된 세계를 말하는 플라톤 철학은 필연적으로 위계적인 구조와 질서를 발생시킵니다. 왜냐면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은 고귀하고, 물질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고귀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플라톤은 이데아로 멀어지는 요인을 '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계급과 질서를 공고히 하여 변화를 막는 것이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러한 플라톤의 철학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의 죽음과 연결되었다고 해석합니다. 플라톤의 마음을 우리가 정확히 헤아릴 순 없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한계가 플로티노스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역설적으로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중세의 오랜 역사를 가능하게 했지만 말이죠.
■ 나오기
신과 이데아에 대한 이야기들은 너무나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플로티노스의 철학이 당대의 혼란한 시대에서 등장했다는 사실을 한번 더 상기시킬 필요가 있겠습니다. 현대에는 가치와 전통, 도덕에 대한 해체주의적인 경향들이 존재하고, 그중에는 타당한 지적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고귀함을 지향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쉽게 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인간적인 가치가 사라지고, 사람이 도구화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겠지요. 어쩌면 - 비록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 윤리의 내용을 지키기 위해 신이라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윤리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라는 말로 플로티노스를 정리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