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생과 한 사회의 역사가 비슷할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어려움이 들이 닥치면 그 시간은 평탄했던 다른 시기보다 더 많은 추억과 기억이 마음 속에 자리잡듯이, 한 사회가 사라질 위기에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방법을 찾느라 다양한 방법론과기록이 남기 마련이다. 춘추전국시에 공자, 묵자, 노자, 법가사상 등이 나타난 이유는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 결과일 것이다.
논어는 공자의 어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과 일상의 사건들이 다양한 제자들과 함께 드러난다. 그래서 논어는 통치사상이기도 하지만 윤리적인 삶의 질서를 제공해주기에 교육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어떤 부분에서 교육에 대한 아이디어를 느낄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학이시습지 學而時習之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_학이
제작백가 시대 노예제나 신분제의 질서보다는 격동기의 변화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학습이 중요하다. 특히 학이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친구들과 함께 배우고 토론하는 것은 실제 삶 속에서 '학'으로 익힌 것들이 '습'으로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을 배우더라도 그 이론이 실제로 이치에 맞는지는 각 사람이 각자의 환경에서 경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이미 정리된 이론은 그 자체로 원리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삶의 경험들과 묶여져야 비로소 실용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많은 위안을 얻는다. 원래 공부하는 것이 자기자신을 위한 목적을 가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쓸모가 있는 것이 된다. 명예와 출세와 개인의 영달을 위한 자기공부는 그래서 마음공부가 되지 않고 사람들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라는 공부 즉, '자기자신에게도 회귀하는 학습'이 되어 버린다. 공자의 시대에도 이런 사라들이 많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공부를 통해서 신분상승을 하거나 한 나라의 제상이 되거나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서 인기를 얻고 돈을 벌기 위한 노력들도 많았을 것이다.
물론, 살기 위해서 혹은 실용적으로 돈을 벌기위해서 하는 공부를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전이라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가? 친구와 함께 공부하고 또 자신이 배운 것들을 '습'을 통해서 실천하고, 그 실천한 것들이 이론과 맞아들어가면서 실제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은 공자의 '통치사상'으로서의 논어의 목적과 잘 맞는 것이다. 자고로 기회주의자들이 정치를 하면 나라를 수익모델로 보고, 소인배들이 정권을 잡으면 개인의 왕국을 만드는데, 오늘 공자에서 보는 것과 같이 '친구들과 함께 학습을 즐겨하는 것'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서 배우고 삶에 대해서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교육은 진정으로 한 사람에게서 사회로, 사회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아닐까?
학이시습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교육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세상에 대해서 알고, 친구들과 함께 이것을 토론하고 나누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민주시민의 덕목'이 아닐까?한다. 대의민주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시민적 덕성의 부족인데, 논어를 통해서 시민으로서의 자질과 학습을 통한 실천으로서의 교육이 직접민주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키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2. 온고이지신 溫故而知新
옛것을 익히 새로운 것을 안다_위정
이런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부분이다. 온고이지신 혹은 온고지신은 위정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것을 익해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은 요즘까지 VUCA시대에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부분이 될 수도 있다. 기술의 발전과 다양한 사상의 급격한 도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 변화에 대응하기 좋은 것들을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것이 '새로움 자체'로 의미를 잃어 버렸을 때 그 안에서 새롭지 않은 부분들이 그 새로움의 내면에서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들은 외면일 뿐이고 새롭지 않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이 그 내면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이것이 고전을 읽고 고전교육을 통해서 미래를 향한 지혜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지나간 일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역사에서는 현재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fact나 information은 없을지라도 인류가 모두 공감하는 knowledge와 Insight, wisdom이 있다. 옛것은 무작정 지나갔으니 볼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옛것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패턴들이 지혜로 남아 있는 것들을 눈여겨 봐야 한다. 옛것인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리일 가능성이 많다. 지금 이 시간을 통해서 고전에서 찾아보는 지혜와 지식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고전이면서 새로운 지식보다는 지혜와 인사이트를 가져다 줄 것이다. 옛것이라고 모두 나쁘다거나 의미가 없다고 하는 지나친 진보보다는 옛 것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삶의 지헤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기울여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계명작처럼 그 시대만이 아니라 한 시대가 지나고 여러세대가 지나도 여전히 읽히는 것들은 온고이지신을 해야하는 것이겠다. 논어가 인간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에 대한 글이라고 본다면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지혜는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겠다. 옛 성현들은 꾸준히 이 부분을 강조해 왔고 또 어쩌면 생태학적으로는 더욱 더 깊은 지혜를 자
3. 바탕의 아름다움
자하가 질문했다.
"아리따운 웃음과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과 검은 눈동자, 소가 곧 아름다움이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림은 소를 한 다음에 그리는 법이지 않는가?"
자하가 말했다.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가 나를 깨우치는 구나!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_팔일편
팔일편에 나오는 공자와 자하의 대화이다. 아름다움은 겉모습에 있지 않고 본바탕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인성의 바탕이 되고 거기에서 부터 인간성이 나온다는 의미이다. 공자시대에도 빼어난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때에는 페미니즘이나 젠더감수성이 높지 않은 시기이니 여성들이 관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지만, 사람을 보는 관점은 외모를 중심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outside-in방식이었을 것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대상으로서는 맞으나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됨됨이는 inside-out이다.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물질우선, 외모지상주의, 인스타감성과 유트브영상으로 점철된 세계에서는 모든 보이는 것이 돈으로 교환되는 것처럼 보인다. 교환되려면 매력적으로 보여야 하고 매력적이면 값어치가 올라가니 사람들이 찾게 된다는 이치이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내실이 있는, 바탕이 아름다움이 먼저이다. 어떤 물건이라도 막상 사용하다가보면 그 바탕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다. 겉모습만 화려하게 꾸며놓고서는 사용할 때는 불편하고오래쓰지도 못하는 물건은 그 만든 사람의 됨됨이가 그 물건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도구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날 때 처음에는 향기가 없는 것 같이 담담하고 검소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윽한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 그 본 바탕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향기가 점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고급향수에서는 3가지의 향기가 시간순서대로 나는 것처럼 본 바탕이 아름다운 사람에게도 그렇게 시간의흐름에 따라서 더욱 깊은 속내가 향기처럼 나오는 것 같다.
마음 공부는 사람의 내면에서 쌓여진 체계들이 삶의 체계로 하나하나 나오는 길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마음을 잘 못먹으면 삶의 체계는 곧 악하여지거나 게을러져서 자기멋대로 정리되어 버린다.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만드는 것, 그것은 아마도 덕이면서도 군자의 길일 것이다.
4. 참된 지혜는 사람을 아는 것이다
번지가 인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이다"
이어서 지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란 지인이다"
공부라는 것은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도 사실은 관찰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 버리면 안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현미경으로 그 좁고 좁은 미생물의 세계를 관찰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몇광년 떨어진 우주의 별들의 기원들을 살핀다. 사회과학은 또 어떤가?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나 경영학이나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주인공이면서 인간들 사이에서 새롭게 연결되는 일들에 관한 학문이다. 그런데 근대계몽주의 이후에 주체의 해체는 주체가 엄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없는 것처럼 과학을 대하고 과학을 제일 우선시하게 되었다. 자연에 인간이 가려지거나 기술에 인간이 압도당하거나 자본에 인간이 교환되는 형식이 된 것이다.
논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공부는 사람에 대한 공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교육은 사람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사랑하고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주체가 빠진 상태로 기술문명이나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교육하는 것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비인간적이 되는 길일 것이다. 몇 천년전의 지혜가 오늘날 전해지지만 매번 같은 패턴을 보이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그 때도 지금도 모두 인간이 존재했고, 인간이 썼으며, 인간이 살아갈 미래라는 것이다. 논어를 읽으면서 인간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배워야할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지 나의 성공이나 번영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되는 방식으로서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친구를 친구로 보고 남들보다 더 나아지는 자아가 아니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기쁜 친구가 되는 길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한 사람의 인생과 한 사회의 역사가 비슷할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어려움이 들이 닥치면 그 시간은 평탄했던 다른 시기보다 더 많은 추억과 기억이 마음 속에 자리잡듯이, 한 사회가 사라질 위기에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방법을 찾느라 다양한 방법론과기록이 남기 마련이다. 춘추전국시에 공자, 묵자, 노자, 법가사상 등이 나타난 이유는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 결과일 것이다.
논어는 공자의 어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과 일상의 사건들이 다양한 제자들과 함께 드러난다. 그래서 논어는 통치사상이기도 하지만 윤리적인 삶의 질서를 제공해주기에 교육학적으로 의미가 있다. 공자가 제자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어떤 부분에서 교육에 대한 아이디어를 느낄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학이시습지 學而時習之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_학이
제작백가 시대 노예제나 신분제의 질서보다는 격동기의 변화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학습이 중요하다. 특히 학이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친구들과 함께 배우고 토론하는 것은 실제 삶 속에서 '학'으로 익힌 것들이 '습'으로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을 배우더라도 그 이론이 실제로 이치에 맞는지는 각 사람이 각자의 환경에서 경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이미 정리된 이론은 그 자체로 원리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삶의 경험들과 묶여져야 비로소 실용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많은 위안을 얻는다. 원래 공부하는 것이 자기자신을 위한 목적을 가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쓸모가 있는 것이 된다. 명예와 출세와 개인의 영달을 위한 자기공부는 그래서 마음공부가 되지 않고 사람들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라는 공부 즉, '자기자신에게도 회귀하는 학습'이 되어 버린다. 공자의 시대에도 이런 사라들이 많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공부를 통해서 신분상승을 하거나 한 나라의 제상이 되거나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서 인기를 얻고 돈을 벌기 위한 노력들도 많았을 것이다.
물론, 살기 위해서 혹은 실용적으로 돈을 벌기위해서 하는 공부를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전이라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가? 친구와 함께 공부하고 또 자신이 배운 것들을 '습'을 통해서 실천하고, 그 실천한 것들이 이론과 맞아들어가면서 실제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은 공자의 '통치사상'으로서의 논어의 목적과 잘 맞는 것이다. 자고로 기회주의자들이 정치를 하면 나라를 수익모델로 보고, 소인배들이 정권을 잡으면 개인의 왕국을 만드는데, 오늘 공자에서 보는 것과 같이 '친구들과 함께 학습을 즐겨하는 것'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서 배우고 삶에 대해서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교육은 진정으로 한 사람에게서 사회로, 사회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세계로 뻗어나가게 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아닐까?
학이시습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교육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세상에 대해서 알고, 친구들과 함께 이것을 토론하고 나누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민주시민의 덕목'이 아닐까?한다. 대의민주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시민적 덕성의 부족인데, 논어를 통해서 시민으로서의 자질과 학습을 통한 실천으로서의 교육이 직접민주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키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2. 온고이지신 溫故而知新
옛것을 익히 새로운 것을 안다_위정
이런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부분이다. 온고이지신 혹은 온고지신은 위정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것을 익해서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은 요즘까지 VUCA시대에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부분이 될 수도 있다. 기술의 발전과 다양한 사상의 급격한 도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 변화에 대응하기 좋은 것들을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것이 '새로움 자체'로 의미를 잃어 버렸을 때 그 안에서 새롭지 않은 부분들이 그 새로움의 내면에서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들은 외면일 뿐이고 새롭지 않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들이 그 내면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이것이 고전을 읽고 고전교육을 통해서 미래를 향한 지혜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지나간 일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역사에서는 현재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fact나 information은 없을지라도 인류가 모두 공감하는 knowledge와 Insight, wisdom이 있다. 옛것은 무작정 지나갔으니 볼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옛것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패턴들이 지혜로 남아 있는 것들을 눈여겨 봐야 한다. 옛것인데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리일 가능성이 많다. 지금 이 시간을 통해서 고전에서 찾아보는 지혜와 지식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고전이면서 새로운 지식보다는 지혜와 인사이트를 가져다 줄 것이다. 옛것이라고 모두 나쁘다거나 의미가 없다고 하는 지나친 진보보다는 옛 것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삶의 지헤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기울여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계명작처럼 그 시대만이 아니라 한 시대가 지나고 여러세대가 지나도 여전히 읽히는 것들은 온고이지신을 해야하는 것이겠다. 논어가 인간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에 대한 글이라고 본다면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지혜는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겠다. 옛 성현들은 꾸준히 이 부분을 강조해 왔고 또 어쩌면 생태학적으로는 더욱 더 깊은 지혜를 자
3. 바탕의 아름다움
자하가 질문했다.
"아리따운 웃음과 예쁜 보조개, 아름다운 눈과 검은 눈동자, 소가 곧 아름다움이로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그림은 소를 한 다음에 그리는 법이지 않는가?"
자하가 말했다.
"예를 갖춘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네가 나를 깨우치는 구나!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_팔일편
팔일편에 나오는 공자와 자하의 대화이다. 아름다움은 겉모습에 있지 않고 본바탕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은 인성의 바탕이 되고 거기에서 부터 인간성이 나온다는 의미이다. 공자시대에도 빼어난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때에는 페미니즘이나 젠더감수성이 높지 않은 시기이니 여성들이 관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지만, 사람을 보는 관점은 외모를 중심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outside-in방식이었을 것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대상으로서는 맞으나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됨됨이는 inside-out이다.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물질우선, 외모지상주의, 인스타감성과 유트브영상으로 점철된 세계에서는 모든 보이는 것이 돈으로 교환되는 것처럼 보인다. 교환되려면 매력적으로 보여야 하고 매력적이면 값어치가 올라가니 사람들이 찾게 된다는 이치이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내실이 있는, 바탕이 아름다움이 먼저이다. 어떤 물건이라도 막상 사용하다가보면 그 바탕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있다. 겉모습만 화려하게 꾸며놓고서는 사용할 때는 불편하고오래쓰지도 못하는 물건은 그 만든 사람의 됨됨이가 그 물건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도구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날 때 처음에는 향기가 없는 것 같이 담담하고 검소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윽한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 그 본 바탕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향기가 점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고급향수에서는 3가지의 향기가 시간순서대로 나는 것처럼 본 바탕이 아름다운 사람에게도 그렇게 시간의흐름에 따라서 더욱 깊은 속내가 향기처럼 나오는 것 같다.
마음 공부는 사람의 내면에서 쌓여진 체계들이 삶의 체계로 하나하나 나오는 길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마음을 잘 못먹으면 삶의 체계는 곧 악하여지거나 게을러져서 자기멋대로 정리되어 버린다.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만드는 것, 그것은 아마도 덕이면서도 군자의 길일 것이다.
4. 참된 지혜는 사람을 아는 것이다
번지가 인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이다"
이어서 지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란 지인이다"
공부라는 것은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도 사실은 관찰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어 버리면 안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현미경으로 그 좁고 좁은 미생물의 세계를 관찰하며 인간이기 때문에 몇광년 떨어진 우주의 별들의 기원들을 살핀다. 사회과학은 또 어떤가? 사회학이나 정치학이나 경영학이나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주인공이면서 인간들 사이에서 새롭게 연결되는 일들에 관한 학문이다. 그런데 근대계몽주의 이후에 주체의 해체는 주체가 엄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없는 것처럼 과학을 대하고 과학을 제일 우선시하게 되었다. 자연에 인간이 가려지거나 기술에 인간이 압도당하거나 자본에 인간이 교환되는 형식이 된 것이다.
논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공부는 사람에 대한 공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교육은 사람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사랑하고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주체가 빠진 상태로 기술문명이나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교육하는 것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비인간적이 되는 길일 것이다. 몇 천년전의 지혜가 오늘날 전해지지만 매번 같은 패턴을 보이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그 때도 지금도 모두 인간이 존재했고, 인간이 썼으며, 인간이 살아갈 미래라는 것이다. 논어를 읽으면서 인간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배워야할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지 나의 성공이나 번영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되는 방식으로서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친구를 친구로 보고 남들보다 더 나아지는 자아가 아니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기쁜 친구가 되는 길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