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해봄_권력이란 무엇인가?_한병철

낭만민네이션
2021-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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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쉽게 폭력과 리더십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권력이란 무엇인가? 정의내리려고 하면 여러가지 전제들을 달아야 한다. 누군가가 있어야 하고, 어떤 특정한 장소가 있어야 하고, 어떤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흐름flow으로 순간에 모여진 힘stock을 묘사할 수 있게 된다. 니체와 푸코, 하이데거와 한나아렌트를 비교해가며 한병철이 어떻게 이들을 데리고와서 권력을 설명하고 그들을 돌려 보내는지, 그래서 어떻게 자신의 권력이론을 만들어가는지를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 피로사회, 투명사회로 변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권력'은 어떤 위치,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함께 고민해보자.



한병철, 작가 소개


한병철 선생님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2010), 『투명사회』(2012) 등의 저작이 독일에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다. 특히 『피로사회』는 2012년 한국에 소개되면서 주요 언론 매체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 사회를 꿰뚫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그 밖에도 『권력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향기』 『심리정치』 『에로스의 종말』 『죽음과 타자성』 『폭력의 위상학』 『하이데거 입문』 『헤겔과 권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목차, 컨텐츠


제1장 권력의 논리
제2장 권력의 의미론
제3장 권력의 형이상학
제4장 권력의 정치학
제5장 권력의 윤리학




출판사, 책 소개


『권력이란 무엇인가』는 장님 코끼리 만지듯 분야와 사상가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읽히고 있는 권력 이론을 하나로 그러모아 정식화한 책이다. 특히 권력에 대해 억압과 금지와 같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바라보는 고정관념을 비판하며, 권력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기 위해 권력과 폭력, 권력과 영향력 등의 미묘한 차이를 구체적으로 짚어내며, 자아의 연속성, 자유, 장소(공간), 생명, 친절함 등의 키워드를 통해 치밀한 논의를 전개한다. 추상적인 권력 이론에서 구체적인 현실 권력에까지 걸쳐 있는 『권력이란 무엇인가』는 권력에 관한 한, 새로운 고전의 반열에 올려도 좋을 종합판 이론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인용 범위는 참으로 방대하다. 유희 또는 공간과 접목한 푸코의 포괄적인 권력 개념을 헤겔을 매개 삼아 정식화하고, 니체를 통해 권력이 의미론적 작용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권력 모델, 아렌트의 등장공간, 슈미트의 예외상황,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등 수없이 많은 이론과 사례, 분석을 불러와 권력의 복잡다단한 현상과 이론을 면밀히 검토한다. 특히 그것을 단순히 소개하고 비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다양한 사상가들을 결합하거나 대결시키고 있어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낸다.

저자의 많은 이론 중에서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권력과 자유를 끊임없이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복종조차 자유다. 권력에 복종하는 자가 복종‘당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것이며 그에게는 다른 행위 선택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그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있을 수 있으며, 더불어 권력이 ‘강제’가 아니라 ‘습관’으로서 등장할 때 더 큰 안정성을 얻는다는 저자의 설명은 우리 현실을 돌이켜보게 하며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권력의 본질과 메커니즘을 정리해 보여줄 뿐 아니라, 권력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친절함”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이 책은 권력 이론의 새로운 지형도를 창조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약, 장별 핵심

1장 권력의 논리에서는 ‘자아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권력은 무엇보다 에고가 타자 속에서 ‘자아의 연속성’을 창출하려는 의지이며, 이는 억압이나 폭력만 가지고는 얻을 수 없다. 그를 위해서는 타자의 행위가 펼쳐질 공간을 부여해주어야 한다.

2장 권력의 의미론에서는 사물들을 해석하는 의미 지평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물들이 의미를 갖게 하는 권력 작용이 논의된다. 이러한 의미화 작용을 통해 권력은 의미화의 가능성을 아예 파괴해버리는 폭력과 구별된다. 권력은 타자를 완전히 억누르거나 무화시키는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라는 부정적 긴장감을 관통하여 자신을 연속시킴을 통해 타자를 장악한다.

3장 권력의 형이상학에서는 타자와 자아의 경계를 지양하지 못하게 하는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해결하는 방안으로서 ‘친절함’이라는 철학적 가능성이 제기된다.

4장 권력의 정치학에서는 현실적 정치 행위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권력이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권력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향한다. 그렇기에 권력 그 자체로부터는 다수적인 것, 다종적인 것, 다양한 것에 대한 호의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서 권력의 윤리(학)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다.

5장 권력의 윤리학은 앞에서 살펴본 권력의 긍정성을 활성화하면서도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아무 구별도 없이 모든 것을 환영하는’ ‘자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친절함’이다.









기본적인 책 탐색을 마쳤으니 이제 핵심으로 들어가보자. 여기서 사용할 기법은 ORID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참여적 관찰기법이라고 부르는 ORID는 먼저 객관적인 사실(Object)을 체크하고, 그러한 사실이 이제 나의 내면으로 들어올 때 느껴지는 것들(Reflection)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이 나의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해석(Interpretation)되는지를 바탕으로 나의 삶 속 대입해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과 '지평융합'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해를 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그것이 바깥으로 나오게 되는 지점이 오는데, 이것이 바로 새로운 변화 혹은 결심(Decision)이 된다. 한병철쌤의 책을 ORID방식으로 살펴보자. 그리고 마침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신만의 성찰, 이해, 결심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1. Object, 사실


강력한 권력자는 권력을 펼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폭력과 혼란은 포괄적인 권력이 부재하는 곳에서, 권력의 담지자여야 할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심급과 기관이 붕괴하는 곳에서 확산되는 것이다. 긍정적 형태로서의 권력은 형성하고 산출해내며 질서를 부여한다. 권력은 폭력과는 반대로 생산적이다. 권력은 혼란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 (한국어판 서문, 6쪽)


제1장_권력의 논리


반대로 권력을 강제, 억압과 동일시하면 권력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되는 것은 "네"가 더 강한 권력의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네"가 언제나 무력無力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없는 사회는 예스맨의 사회일 것이다. 권력을 폐지하려면 모든 사람에게서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저항,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그의 당연한 자명성과 자유 앞에서 끝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권력은 앞으로 나아간다. 권력은 다른 사람의 "아니요"를 물리치고, 그의 자유를 부정함으로써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다. 권력은 자유를 제거할 수 있는 자유다.

 강제로서의 권력이라는 모델은 권력의 복합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강제로서의 권력은 타자의 의지에 대항해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의 매개 수준은 매우 낮다. 여기서 에고와 타자는 서로에 대해 적대적 관계에 놓이며, 에고는 타자의 영혼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매개 수준이 높은 권력은 타자가 하려는 행동에 맞서는 권력이 아니라 그 타자로부터 솟아나 작용하는 권력이다. 더 강한 권력은 타자의 미래를 봉쇄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형성해준다. 그러한 권력은 타자의 특정 행동에 맞서려는 대신, 타자의 행동반경에 영향을 주거나 그것을 변화시킴으로써 부정적인 제재 없이도 타자가 자발적으로 에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게 한다. 이를 통해 아무런 폭력 행사 없이 에고는 타자의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p. 18

오늘날의 지구화가 갖는 문제는 그것이 세계 전체를 매개할 정도로 충분히 지구적이지 못한 결과, 심각하게 비대칭적인 구조가 지배적이고, 기회와 원천은 정당하게 분배되지 못하며, 그 어떤 포괄적인 권력과 매개 심급에 의해서도 서로 묶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p. 41

  "권력은 폭력보다 "더 넓은 공간을 갖는다geräumiger." 폭력이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면sich mehr Zeit läßt" 권력이 된다. 이런 점에서 권력은 더 많은 공간과 시간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고양이의 쥐 놀이에서 공간은 죽음을 향한 협소한 공간일 뿐이다. 사형수의 감방은 짐승의 아가리보다 넓기는 하지만, 불안으로 가득 찬 권력 공간은 결코 긍정적인 행위 공간이 될 수 없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나려면 위에서 말한 "놀이"는 단지 살해하기 전의 서곡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략적 가능성들이 생겨날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놀이 공간Spiel-Raum이 전제되어야 한다. 권력은 아직 죽이지 않음das Noch-nicht des tödlichen Zugriffes보다 더 큰 시공간을 전제한다. 죽음의 문제에 집착한 나머지 카네티는 권력이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게 하는 것이라는 걸 잊었다. 권력의 부정성에 집착한 나머지 카네티는 권력이 행위와 자유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전혀 다른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을 부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할 수 있음 혹//은 자유의 시공간이란 결국에는 환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권력은 가상Schein의 형태로라도 그런 시공간을 필요로 한다.p. 46


제2장_권력의 의미론


 어떤 단어라 할지라도 그것의 모든 지시 관계가 공허해지면 총체적인 의미 상실을 겪는다. 언어란 한 단어나 한 문장이 의미를 가제 해주는 지시 구조물이다. 하나의 도구 역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로부터, 곧 그 목적과 기능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

그래서 의미란 관계 또는 관계 맺기의 현상이다. 무엇인가는 자기 자신을 넘어 관계망, 의미 연속체 혹은 의미 지평 속에 놓였을 때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이 의미 지평은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그 자체로만 바라보는 대신 그를 이해하면서 다가가기 위한 전제가 된다. 이처럼 의미 지평은 의미를 이해하려 하는, 다시 말해 주체화하려는 지향성의 토대가 되지만 그 자체가 주체화될 필요는 없다. 어떤 이해나 행위를 효과적으로 통솔하기 위해서 권력은 일정한 의미 연관에 기대거나 스스로 의미 지평을 만들어내야 한다.

권력은 의미 있음Sinnvollen의 빛 속에서 등장할 때에야 비로소 안정성을 얻는다. 바로 이 점에서 권력은 폭력과 구분된다. 폭력은 모든 의미를 결핍하고 있기에 벌거벗은 채로 작동한다. 그와 반대로 벌거벗은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권력과 의미 생성 사이의 복합적 연관성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아주 기초적인 신체적 차원에서조차 권력을 의미에 연관시킨다. 의미는 권력이다. 니체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힘/권력을 타자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호는 "한 의지를 다른 의지에게 (종종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전유하려는 욕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상처를 입히는 육체언어야말로 최초의 언어일 것이다.

개념Be-griff이라는 단어 역시 이러한 폭력적 붙잡음Griff에서 연유한다. 권력자는 상처 내기와 고통스런 "찌름"을 통해 자신을 이해시킨다. 그렇기에 "타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더 강한 자의 기호언어"다. 매개가 결핍되어 있는 이러한 권력의 의미론에 따르자면, 기호란 본래 상처일 것이다.

특별한 기호언어를 수용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타자의 정복"으로부터 생겨난 "고통을 수용하고 낯선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재빠른 이해력은 "되도록 매를 덜 맞으려는" 목적에 기여한다. "말한다는 것은 상처를 입히는 것이며 그것의 의미는 지배에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복종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어에 따른 동사변화Konjugation, 굴절Beugung은 본래 타인의 의지에 자신을 굴복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니체는 명명을 주인의 권리라고 본다. 지배하는 자들은 "모든 사물과 사건에 고함을 질러 낙인을 찍음으로써 그것을 자기 소유로 삼는다." 언어의 기원은 "지배자의 권력이 드러남"에서 찾을 수 있다. 언어란 "태곳적에 이루어진 사물들의 점유의 메아리"다. 니체는 모든 단어에서 "이제 이것은 이렇게 불려야 한다"는 "명령"을 듣는다. 명명하는 것은 동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권력이 의미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령하는 자이자 입법자"이기도 한 "본래적인 철학자들"이 내세우는 구호다. 모든 단어는 권력의 단어다. 권력자가 사물의 의미와 그 지평을, 다시 말해 "어디로? 그리고 무엇을 위해?"를 규정한다. 권력자가 사물들의 해석이 의거하고 있는 의미 연속체를 수립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의미 연속체는 권력자가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자아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니체에 의하면 의미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까지 밀려난 본래 그러함Es-ist-so, 즉 무관심적 직관 속에서나 발견된다는 사물과 세계의 본질So-sein이 아니다. 만일 의미가 소유나 지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명명하는 자란 권력자가 아니라 보는 자 혹은 듣는 자일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한 권력의 일원론은 사물들로부터 모든 본래 그러함을 앗아간다. 권력 의지의 결핍은 의미의 공허로 이어진다. 의미란 우리가 그저 받기만 하는 선물이 아니며, 권력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사건도 아니다. 그것을 일종의 획득한 먹잇감이다. 권력이야말로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권력은 말이 없고 무의미한 강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권력은 달변이다beredt. 권력은 사물들을 명명하고 그것의 '어디로'와 '무엇을 위해'를 규정함으로써 세계를 표명한다.

 권력은 사물들이 그에 의거해 해석되는 의미 지평을 만듦으로써 사물이 의미를 갖게 만든다. 사물들은 권력관계 속에서 비로소 중요해지고 의미를 얻는다. 권력관계가 의미를 구성한다. 의미 그 자체라는 것은 없다. "의미란 관계의 의미이자 관점이라는 것이 필연적이지 않은가? 모든 의미는 권력의 의지이다(모든 관계 으미는 그리로 소급된다.)." 진리조차 권력과 결탁하고 있다. 진리는 권력 의지에 상응하는 구상 또는 구성물이다. 이 구성물이 "특정한 종류의 비非진리가 승리하고 지속되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의미 구조물은 "관점을 가진 가치평가들"이며, "그 덕택에 우리는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권력 의지, 권력의 성장에 대한 의지 속에서 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모든 목표와 목적은 "단 하나의 의지의 표현 방식이자 그것의 변신"이며, 그 의지란 다름 아닌 권력 의지이다. 의미의 발생은 권력의 발생이다. 이는 "권력 의지가 그보다 적은 권력을 갖는 어떤 것의 주인이 되어 기능의 의미를 각인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사물"의 역사는 권력의 역사이기도 하며, "늘 새로운 해석들의 기호-연쇄의 지속"이기도 하다. "성장하려고 의욕하는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의 가치에 따라, 자신의 권력 증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의미에 따라 "해석"한다.(pp. 51-6.)  

권력을 악마화하면 권력이 갖는 의미론적 작용을 보지 못한다. 니체에 따르면 권력의 의미론적 작용이야말로 벌거벗은 목소리를 언어로, 곧 의미와 함께 짜여 있는 언어로 변신시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권력의 일원론이 갖는 문제점은 모든 의미 발생을 권력 발생으로 해석한다는 데에 있다.

 푸코도 "권력을 금지라고 하는 부정적이며 몸통 없는 형태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을 비판한다. 바로 그러한 경향이 푸코의 권력 이론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왜곡시킨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푸코에게 있어서 권력의 역사는 "상실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푸코는 그와 달리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권력은 본질상 억압하는 것이다. 권력은 자연과 본능을 억압하고, 한 계급을 억압하며, 개인을 억압한다. 권력을 억압으로 정의하는, 수백 번 반복된 이러한 정의가 현시대 담론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이는 현시대 담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헤겔이 그렇게 말했고, 이후 프로이트가, 다음엔 라이히가 그렇게 정의했다. 그를 통해 "억압하는 기관"이라는 용어가 오늘날 권력에 대한 거의 자동적인 명칭이 되었다." 억압이란 특정한, 곧 매개가 부족하거나 없는 권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권력은 억압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푸코는 여러 번 권력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개념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권력이 '배제하고' '억압하고' '억누르고' '검열하고' '추상화하며' '감추고' '은폐한다'고 권력 작용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오히려 권력은 생산적이다. 권력은 실재를 생산해낸다." 권력은 "힘을 가로막고 종속시키거나 제거하는 대신, 그 힘들을 산출하고 자라게 하며 질서를 세운다."

신체와 권력의 연관관계에 대해 푸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권력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사람들이 권력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권력이 행하는 금지의 폭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사실상 신체를 관통하고, 사물들을 산출해내고, 쾌락을 일으키고, 지식을 산출하며, 담론을 생산해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권력은 사회적 신체 전체를 포괄하는 생산적 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권력을 억압 기능을 수행하는 부정적 심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pp. 59-61.)  

 노예를 강철로 된 사슬로 묶어두는 자는 아둔한 전제자일 뿐이다. 참된 정치가는 노예 자신의 생각의 사슬로 그들을 더 확실하게 묶어둔다. 그 사슬의 다른 쪽 끝은 불변하는 이성의 질서에 묶여 있다." 이 권력은 주권자적 권력보다 더 안정적이다. 왜냐하면 이 권력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다시 말해 외적 강제 없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권력은 자유와 복종이 함께 일어나게 한다."(pp. 66-7.)  

 규율권력은 반성Reflexion이 아니라 반응Reflexe을 통해 작동한다.  그렇기에 이 권력은 일상성의 모습을 띠고 있다.p. 69  

 규율권력은 복종하고, 말을 잘 듣고, 고분고분한 신체를 생산해낼 뿐만 아니라, 담론 또한 생산해낸다. 말하자면 규율권력은 지식도 산출해낸다. 권력은 철학적, 형이상학적 담론으로서의 인간-기계를 규율권력과 소통시킨다.

푸코는 "지식은 권력관계가 지연된 곳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생각, 지식이란 권력의 명령, 요구, 이해관계의 외부에서만 전개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사유 전통을 거부할 것을 요구한다. "권력이 광기를 만들어내며, 권력을 포기해야만 현자賢者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거절하라는 것이다. 이는 지식의 장을 구성하지 않는 권력관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나아가 권력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지식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pp. 70-1.)  

정치적 복종은 신체의 태도에, 주름살과 습관 속으로, 두뇌의 자동주의로 침전해 들어간다(Pierre Bourdieu, Satz und Gegensatz. Über die Verant-wortung des Intellektuellen, Berlin, 1989, S. 43 참조_p. 73 49번 각주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 운명이 자유로운 선택인 양 체험되는 것이다. 피지배자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자신의 상태를 자기 취향으로 삼게 된다. 빈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되고, 강제나 억압이 자유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지배적 권력관계가 합리적인 근거들과 무관하게 거의 마법적 방식으로 재생산되도록 만든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권력은 강제라는 모습으로 등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권력은 자유의 감정을 불러내는 곳에서, 어떠한 폭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막강하고 가장 안정적이다. 이때의 자유는 사실일 수도 있고 가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권력을 안정시키고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p. 73-4.  

  "… "타자의 지배", 곧 세인의 지배에 대해 하이데거는 "본래적 실존" "자신에로의 결단"을 대립//시킨다. 세인들의 "독재"에 대항해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자기 자신을 붙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권성이다. 여기서 주권성이라는 것은 세인들의 독재로부터, 즉 '공적인 해석'의 의미 연속체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단은 현존재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태를 초월하지 못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실제로 가능한 곳"에, 실제 삶의 연관 속에 던져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따라서 자유란 "내던져져 있음Geworfen-heit"의 틀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자유와 "내던져져 있음"은 근본적으로 서로를 배제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을 사회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다. 그래서 그는 "내던져져 있음"이 종속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기획성Entworfenheit"이 바로 그 종속에서 연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지배 질서를 향한 자신의 기획은 현존재가 의미 연속체, 즉 특정한 "세계 해명과 현존재 해명"에 자신을 종속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내던져져 있음'과 '종속되어 있음' 사이의 관계는 '존재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도 조건 지어져 있다. 하이데거의 일상성의 존재론은, 일상적인 이해가 '상징 권력'을 기획하는 "일상적 이성"에 묶여 있을 수 있다는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권력은 "세인"으로 등장할 때, 즉 자신을 "일상성"에 기입할 때 높은 안정성을 얻는다. 강제가 아니라 습관의 자동주의가 권력의 효과를 상승시킨다. 절대적 권력이란 모습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명성과 완전하게 합치되어 있는 권력일 것이다. 권력은 부재를 통해 빛을 발한다."(pp. 81-3.)  


제 3장_권력의 형이상학


왜 인간은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가?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로울수록 타자의 태도를 규정하는데서 더큰 쾌락을 느낀다. 타자의 태도를 유도할 때 얻는 유희가 다양하고 자유로울수록 쾌락은 더 커진다. 그에 반해 이러한 유희 가능성이 없는 사회에서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쾌락도 줄어든다. p87

권력은 유희 속에 속할 수도, 또 유희의 요소를 갖추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유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희는 권력의 대립문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특징으로 보는, 더 많은 것을 향한 의욕



제 4장_권력의 정치학


권력은 이러한 연속성을 형성하고 에고 혹은 에고의 의지를 공간화한다. 그에 반해 폭력이나 박해는 갈라진 틈을 더 깊게 하고 공간을 축소시킨다. 한 명의 개인 행위자에게 집중되어 있지 않은 관계에서도 권력은 연속성을 낳는다. 권력은 부분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매개하는 전체성의 중력을 형성한다.

혁명 상황에서는 폭력이 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에만 의존하고 어떤 권력에도 의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권력이 없으면, 즉 타자의 동의가 없으면 폭력은 좌초할 수밖에 없다. 그와 달리 권력을 가진 폭력은 새로운 공간을 이끌어낸다. 폭력은 공간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공간을 창출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p. 132  

한나 아렌트는 의사소통적 행위 모델에서 출발한다. '권력은 행동하거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서로 관계를 맺고 그들과의 합의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인간 능력에서 나온다.' 권력의 근본 현상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자의 의지를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공동의 의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권력은 사이에서 나온다. "본래 그 누구도 권력을 점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며, 그들이 다시 흩어지자마자 사라진다."p. 135-6


제 5장_권력의 윤리학


권력의 논리라는 점에서 보자면 육지적 장소화와 디지털의 장소화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디지털 공간을 점령하거나 지배하는 자는 권력을 갖//는다. 시장 역시 경제적 영토 점유를 통해 점거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간에 둘러싸고 싸움을 벌이듯, 시장 지분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진다. 세계화된 시장은 더 이상 육지에 구속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장소화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여기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자신의 장소를 확정sich zu verorten해야 한다. "합병"이나 "인수"는 본질적으로 영토 점유와 구별되지 않는다. 권력을 확장시킨다는 점에서는 영토 점유와 똑같다. p. 156

 자유는 권력관계를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중요한 요소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행사된다. 주체들이 자유로워져야 권력관계가 존속한다. "온통 거것으로만 채워져 있는 "자유로운 주체들 "에게만 행사된다. "온통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만 채워진 곳에서는 노예제가 존재하지 ㅇ낳는다. 인간이 철로 된 족쇄에 묶여 있는 한 노예제는 권력관계가 아니다(그것은 물리적 강제관계이다.). 인간이 움직일 수 있고 극한의 경우에는 달아날 수 있을 때에만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권력과 자유는 (권력이 행사되는 곳에서 자유가 사라진다는 식으로)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은 훨씬 더 복잡한 놀이Spiel 관계를 갖는다. p. 161

지배관계란 권력관계가 안정성을 원하고 있는 상태이다. 나아가 놀이의 개방성이 권력의 본질적 특성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은 개방성을 축소하려는 경향을 띤다. 개방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불안이 권력에 대한 욕구를 증가시킨다. 자신을 확고하게 안정시키려 하는 권력은 열린 놀이 공간이나 예측 불가능한 공간을 제거한다. 권력 공간은 전략적인 공간이다. 전략적 개방성은 놀이에 내재하는 쾌락적 개방성 또는 불확실성과 다르다."p. 164.

 정의는 모든 것을 수렴시키는 권력 구조에 대립적인 운동을 산출해낸다. 권력에는 하나를 향한 특성이 내재한다. 그렇기에 권력으로부터는 다수적인 것, 다종적인 것, 다양한 것, 부차적인 것 혹은 빗나가 있는 것에 대한 호의가 나오지 않는다. 그에 반해 정의는 "모두에게, 살아 있건 죽어 있건, 현실적인 것이건 생각의 소산이건, 자신의 몫을 주려고" 한다. 그러하기에 정의는 자기중심적이도 중앙적이지도 않다. 니체는 한발 더 나아가 정의를 "확신의 반대자'라고 칭한다. 정의로운 자는 자기 자신보다 사물에 더 귀를 기울인다. 확신에 거리를 두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것은 늘 자신에 대한 확신을 내포하기 마련인 지금의 확신을 넘어 사물들에 더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더 보려 한다. 정의로운 자는 늘 너무 빨리 오는 자신의  판단을 보류한다. 그런 판단은 그 자체로 이미 타자에 대한 배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보기 드문 금욕, 타자를 판단하지 않고 그에 대해 생각하기를 주저하는 것. 이는 결코 소소하지 않은 휴머니티의 표지다." 자신에 대한 확신과 타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유동적으로 열어두고, 듣고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판단, 곧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제하는 자는 정의를 행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늘 타자를 위하는 것보다 먼저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 자체로부터는 개벌적인 자세가 나올 수 없다. 권력에는 망설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서 권력은 타자를 판단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은 판단과 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직 '넓게 돌아보는 권력', 다시 말해 "사려 깊은 눈"을 가진 권력만이 폐기 장소를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장소화할 수 있다. 그 권력은 "모든 것"에 "그들의 몫"을 주는 정의로운 장소를 정초할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종류의 정의正義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무 구별 없이 모든 것을 환영하는 경계 없는 친절함이다. 생성하고, 방황하고, 구하고 도망하는 모든 것은 내게로 우라! 환대는 나의 유일한 친절함이다." 이러한 유일무이한 환대는 "모든 것"에 그들의 몫 이상을 준다. 바로 이 점에서 환대의 장소와 정의로운 장소가 구분된다. 하이데거에게는 장소가 "모인 것들을 투시해 비추고 꿰뚫어 밝힘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본질 안에 풀어놓는" 한, 정의로운 장소이다. 하지만 그 장소는 "모인 것" 밖에 있는 긍정하는 저 경계 없는 환대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p. 173


질문/ 자신이 인상깊게 읽었던 구절을 이야기해보자. 어떤 부분이 기억에 남는가?



2. Reflction, 느낌과 반응


한국인들에게 권력은 왜 이렇게 전체주의 혹은 권위주의와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걸까? 한병철의 글을 읽으면서 권력을 새롭게 보기시작했다. 박정희의 사진들이 생각났고, 무솔리니나 히틀러가 생각났다. 그리고 혹시나 좋은 권력에 대한 것들이 생각났나?라고 되내여봤을 때는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이 떠올랐다. 리더십하면 권력보다는 무엇인가 친철함이 떠오른다. 그리고 폭력보다는 무엇인가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기도 한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 항상 선생님들이 가진 권력은 학생들을 마음대로 때릴 수 있는 권력이었으며 나는 생각해보면 맞지 않을려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선생님들께 데든다 혹은 버릇이 없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난다. 친한친구는 선생님에게 말대꾸했다는 이유로 중2학년이 3연타를 1초만에 얻어 맞고 바로 쓰려졌던 기억도 난다. 알고보니 그 선생님은 아마추어 권투선수 출신이었다.

보는 내내 신기한 권력개념이 제시되어서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렇게 권력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내어 놓았다는 것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해결해야할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이 되었다.


질문 / 읽으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나 시각, 관점을 바꾼 내용들이 있는가?


3. Interpretation, 이해


가장 깊은 이해를 준 것은 푸코의 권력개념이었다. 푸코는 권력을 세가지로 구분했다.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폭력, 상징과 기호, 규율권력이었다.

폭력은 가장 낮은 수준의 권력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권력으로 인해서 ‘권력’자체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폭력을 통해서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폭력에 의해서 자신의 권력을 빼았겼다.

타자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권력효과를 사용하는 것, 그래서 ‘기호와 상징’을 통해서 끊임없이 타자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드는 것이 바로 두 번째 푸코의 권력 개념이다. 어떤 상징과 기호 앞에서 사람들은 경계를 하고, 절을 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기호와 상징은 거시적인 체계에서는 국가로 대변되었고, 미시적인 체계에서는 리더로 소급되었다.

마지막으로 권력은 규율권력으로 바뀐다. 규율권력은 폭력을 행사하지도, 기호와 상징을 학습시키지도 않는다. 아주 단순한 법칙, 도덕, 규범을 통해서 일상적인 부분에서 하나하나를 통제한다. 누군가가 없어도 미시권력으로서 규율은 작동한다. 이러한 규율권력은 폭력적인 피를 흘리지도 않고, 따로 학습을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규율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반응, 그 반응으로 행동하게 되는 수행성performaty를 통해서 권력은 그 사람의 뼛속까지, 미래까지 스며들어서 그 사람을 움직인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러한 규율사회는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 바이러스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성과사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프로젝트를 만드는 서브젝트(주체)가 되었지만, 그 프로젝트를 만드는 순간 자신도 그 프로젝트가 수행되어서 영향을 받는 오브젝트(대상)이 된 것이다. 이것이 심리정치에서 한병철이 말하는 신자유주의의 권력행사 방식이다. 성과주체는 스스로가 만든 미래의 이미지와 성과를 위해서 스스로 규율을 만들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를 돕는다.


질문 / 권력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는가? 나는 권력을 어디까지(범주), 어느정도까지(깊이), 어떤방식으로 연결되는지 이해하고 있는가?


4. Decistion, 결정


올바른 권력, 따뜻한 권력,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권력이 실행되기 위해서 어떤 대안을 만들어야 할까? 그 대안을 찾기까지 계속해서 권력개념을 발전시켜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시 친절하게 돌려 줄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권력을 실천해야겠다. 권력의지로 작동되는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충분한 성찰과 멈춤(비타 컴템플라티바)을 통해서 무작정 수행되는 권력이 아닌 생각하고 고민하는 권력을 실행해야 겠다. 이것은 비타악티바가 일어나기 전에 고뇌이면서 ‘악의 평범성’을 넘어서는 권력의 의지이다.

권력은 자리에 주어져 있다. 권력에 대한 책임,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권력을 잘 이해하고, 그 권력이 행사될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권력지도’를 그려봐야 겠다. 그러한 권력지도를 통해서 나의 권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와 내가 어떻게 권력의 영향을 받는지를 알아봐야 겠다.







종합질문, 토론


1. 권력과 거버넌스의 연관성을 생각해보자. 아래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거버넌스는 다수가 모여서 권력을 분산하거나 협력하여서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사회혁신'을 위해서 권력의 측면에서 어떤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하는가?



정부와 시민사회는 거버넌스의 의해서 권력을 분산해서 갖는다.





2. 리더가 되면 권력이 생긴다. 당신은 어떤 권력을 지향하는가? 그에 맞는 리더십 스타일은 무엇인가? 보스형인가 리더형인가? 우리가 사회혁신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 대략 대통령이 되면 1000개정도의 리더들을 임명할 권한과 권력이 생긴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대통령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권력지도를 만들 것인가? 주변에 두고 싶은 측근은 어떤 사람이면 좋겠는가? 아래에서 보는 이너서클, 핵심측근, 전문가그룹 등등으로 생각해보자.

 




4. FIRO-B 검사에 의하면 사람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소속, 통제, 정서의 3가지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자신은 소속, 통제, 정서의 욕구 중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크고, 약한가?


▶소속욕구(Inclusion)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그룹에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통제욕구(Control)는 사람들 사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정서욕구(Affection)는 일대일의 정서적인 유대와 개인적인 따뜻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5. 아래 권력 거리지수를 통해서 볼 때, 권력거리가 작을 수록 수평적, 민주적인 관계가 만들어진다. 지금 우리 조직에서 권력거리를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


권력 거리 지수(power distance index; PDI): “권력 거리란 조직이나 단체(가족과 같은)에서 권력이 작은 구성원이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를 수용하고 기대하는 정도이다.”[7]
권력 거리가 작은 문화에서는 권력 관계가 보다 상호의논적이고 민주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는 형식적 위치에 관계 없이 보다 평등할 것이고, 하급자들이 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권력자의 의사 결정에 기여하거나 비판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 반면, 권력 거리가 큰 나라에서는 권력이 작은 측이 전제적이고 가부장적인 권력 관계를 그대로 수용하기 쉽다. 하급자는 사람의 권력은 단순히 그 사람의 특정한 형식적 위치, 계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프스테더의 권력 거리 지수는 객관적인 권력 분포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불평등을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리더십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아래와 같은 리더십스타일을 구분해볼 때 우리는, 나는 어떤 리더십을 장려하고 발전시켜야 할까? 이것은 어떻게 권력을 사용하게 될까?

체제유지 리더십

거래적 리더십

변혁적 리더십

섬김의 리더십

진성성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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