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권력 8월 모임
190806(화) 19시~
@ 시청부근 폴바셋
경인, 새미, 유준, 준원
ⓒ PIRO4D, Pixabay
|
13장 피터 버거와 실재의 사회적 구성: 인간주의 사회학_하홍규 |
1. 본문 발췌
우리의 생활은 우리 동시대인들의 어리석은 생각뿐만아니라 몇 세대 죽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에 의해서도 지배되고 있다.
사회학이 학대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신화들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학은 폭로를 통해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자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시상 우리가 의심 없이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을 구성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믿음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는 자연적 태도를 갖고 살게 된다.
사회란, 진행 중인 역사적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이 살고 이있며, 또한 인간을 만드는 인간 세계의 부분으로서의 사회이다. 우리 인간들은 실재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우주적 드라마의 창작자임을 망각한 연기자이다.
사회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과 주관적인 의미들 간의 하나의 변증법, 즉 외부의 실재로 경험하는 것(특히 개인이 직면하는 여러 제도의 세계)과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 간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 것
사회는 객관적 사실성을 가지고 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는 주관적 의미를 표현하는 활동에 의해 확립된다. 두 가지 명제는 모순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이중적 성격을 보여줌, 어느 한 쪽도 다른 한 쪽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다.
현상은 지향성을 통해 성립된다. 이 때 지향성이란 우리의 의식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는 고정되고 불변하는 외적 실재가 아니라, 언제나 지향된 실재이다.
사회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철학자들처럼 '실재가 무엇인가'(존재론적 물음), 그리고 '그 실재를 어떻게 아는가'(인식론적 물음)라고 묻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세계를 원래 그러했던 것으로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사회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본질에 대한 탐구로 들어가기 위해 중지시켰던 바로 그 자연적 태도를 가지고 산다.
자연적 태도는 한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어떤 주관적인 태도나 자세를 말함이 아니고 사회 혹은 세계의 성원들이 다른 타인들과 함께 지니게 되는 자연적 태도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세계 안에서 삶을 살고 있다.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자연적 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실재 감각, 공유하는 시간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버거가 보여주려는 것은 자연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달리 말해서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다가온 세계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된 세계라는 것이다.
사회는 인간의 산물이다, 사회는 객관적인 실재이다, 인간은 사회적 산물이다.
외재화는 인간이 신체적-정신적 활동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분출해내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폐쇄된 내재성 안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밖으로 표출하면서, 자신을 위해서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자신을 위한 세계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인간은 동일한 문제를 만날 때마다 매번 어떻게 행해야 할 지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를 수행한다. 즉, 선택의 폭을 줄여 '노력의 경제'를 달성하는 것이다. 제도화의 과정은 인간 행위가 유형화되고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도적 전형은 행위자들의 행위도 전형화하고 그 행위자들의 정체성도 전형화한다. 이른바 '역할'이 바로 인간이 사회에서 갖는 정체성의 전형이다.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의된 유형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는 통제기제이다.
물화는 인간이 인간 세계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나아가서 생산자인 인간과 그의 산물 사이의 변증법이 의식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상 물화된 세계는 탈인간화된 세계다. 그 세계는 인간에게 생소한 사실성으로, 자신의 생산 활동인 노동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소외의 산물로 경험된다.
사회적 세계는 공교롭게도 개인들에게 매우 육중한 실재로서 경험되기 떄문에, 사람들은 이 세계가 자신들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생활은 창조자가 자신인 것을 잊고 사는 소외의 삶이라 하겠다.
교수형 집행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안에서 죄수를 죽이는 일을 한다. 그는 그 역할 안에서 결코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지만, 타인의 목숨을 앗는 행위를 한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버거는 사회세계를 우리 인간들의 비본래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창조자임을 잊기에 가능하다.
내면화는 객관화된 사회 세계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의식 안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이다. 즉 객관적 세계의 구조가 주관적 의식의 구조로 변형되는 과정이다. 이로써 인간은 사회의 사물이 되는 것이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면화를 통해 타인과 공동의 세계, 즉 상호 주관적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이 물려받음이 바로 내면화인 것이다.
동일시를 통해 사회 세계는 나에게 주관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전유된다 나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객관적 사실성은 내면화를 통해서 이제 주관적 사실성으로, 곧 나에게도 확실하고 견고한 사실성으로 전환된다. 이 때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개인은 그 사회 세계에서 이른바 정상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사회세계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성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다. 인간들에 의해 만들여졌기에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세계이다. 그래서 "사회의 제도들은 우리를 사실상 제약하고 강제하는 한편, 동시에 연극상의 관례, 심지어는 허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사회라는 드라마를 공연하는 연기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드라마를 공연하면서 과거의 연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연극의 관례를 마치 영원한 진리인 양 여긴다. 그러나 사회가 우리를 속박할 때 이는 우리 자신들의 협력과 공모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 인간은 단지 객관적 세계로부터 억압받는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라는 거대한 상직정 세계의 공모자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인간들의 드라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들이 '자연적 태도'에서 한발 물러서서 그 당연함을 처로히한다면, 곧 거부할 수 없는 객관적 실재로 경험되었던 것이 사실상 우리가 함께 연출한 드라마인 것이 드러난다면, 그때 에는 이 사회 세계가 주로 자기기만 으로 작동하는 곳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기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앎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이 오히려 인간 자유가 실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각성이 있을 때 인형극은 살아 있는 인간의 무대과 되며, 주어진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가능성의 세계가 된다.
자기기만은 간단하게 말해서 실제로는 자발적인 어떤 것을 필연적이라고 핑계되는 것이다.
자기기만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며, 선택의 고통을 불성실하게 회피하는 것이다.
경험을 감각 경험으로 제한할 때,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도는 훨씬 더 줄어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은유가 통쾌한 앎을 선사할 수도 있다. 사회학이 반드시 과학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은 설사 과학적이지 않더라도 경험적일 수 있다
엑스터시(ecstasy): 문자 그대로 사회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례 밖에 서 있거나 또 그밖으로 나가는 행위이다.
사회학자는 사회라는 드라마 가운데서 자신을 발견하고, 줄이 당겨질 때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위치가 사회의 교묘한 끈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연기하는 중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자신을 움직이는 장치를 지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버거는 바로 여기에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과학적인 수단으로는 사회적 행동에서 자유의 문제에 대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떤 사회학자가 되느냐는 과학이 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자 스스로의 선택의 문제이다. 다만 자유로부터 도피하지 않기 위해 선택의 고통도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 이다.
2. 주요키워드
#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 # 외면화, 객관화, 내면화 # 엑스터시 # 사회라는 드라마와 비본래적 실존 |
3. 독후감
ⓒ ErikaWittlieb, Pixabay
#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
“사회는 인간의 산물이다, 사회는 객관적인 실재이다, 인간은 사회적 산물이다.”
피터버거는 사회의 속성을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해한 바로는 객관적 실재는 인간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고, 주관적 경험은 사회 안에서의 인간이 오감을 통해 감각하는 세계에 대한 총체를 말하는 것 같다. 이 두가지 요소로 사회는 구조를 이루고, 사회 내에서 실재와 주관적 경험을 통해 다양한 상호작용이 이뤄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외면화, 객관화, 내면화
버거는 위의 외면화, 객관화, 내면화가 선후 관계없이 변증법적으로 사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외면화는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 객관화는 사회를 만든 인간이 그와는 무관하다고 느끼는 무언가를 실재로서 경험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어렵다. 나랑은 별개로 저게 사실이구나, 저게 맞구나 느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면화는 그러한 사회의 산물을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 것으로 전형화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 엑스터시
“버거가 보여주려는 것은 자연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달리 말해서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다가온 세계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된 세계라는 것이다.”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문장으로 사회 내의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대게의 ‘나’가, 사회 내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능동적 존재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꿈꾸게 될수 있는 것 같다. 사회가 고정적이고, 인간은 구성물로서만 존재한다면, 나의 잠재성과 고유성과는 무관하게 정해져 있는 루트에서 속도 이외에는 변화시킬 수 있는게 없다고 느껴진다. 사회변화를 추구할 때도, 구조에서 요구되어지는 자격을 취득해야만이 권력자로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만같은 프레임이 갇히게 되는 것 같다. 그런 건 참으로 숨이 막힌다. 하지만 버거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에 의해 구성된 세계라고 말한다.
# 사회라는 드라마와 비본래적 실존
사회가 규정지어놓은 루트에서 벗어날 때 짜릿함을 느낀다. 해방감과 살아있다는 느낌을 느낀다. 가령, ‘~해야 착한 사람이지’라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이 들어왔는데, 역할을 덧씌우는 것 같아 기분이 항상 나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가 왜? 꺼져”라는 내면의 깊숙한 플로우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집을 나왔을 때 나에게 덧씌워진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면서 짜릿한 해방감과 살아있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던 기억이 난다.
칼 로저스는 상담에서 비본래적 실존을 이야기 했다, 이마를 딱 치며 그에게 푹 빠져들게 되었는데, 비본래적 실존이라함은 내가 이해한 바로는,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 같다. 나답게 산다는건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는 것, 외부세계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걸 말한다. 타자를 해하는 것이라면 제재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와 사회의 경계를 확인해나가고 있는게 어쩌면 내 삶과 유사한 것 같다.
연기를 그만두면, 약속을 어기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생각될까봐 두렵다. 두려움에 억압되어, 삶이 무기력해지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순간의 엑스터시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연기를 그만두고 나의 세계를 내가 주체가 되어 구성해나갈 때, 피터 버거가 말한 자유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사람들과 나눠보며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다.
4. 기타
경주마/박노해
너는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
어느 날부터 경주마로 길러지고
너는 지금 트랙을 달리고 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좋은 사료를 먹고 좋은 기수를 만나
레이스에 앞서는 게 아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결국
트랙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네트워크 권력 8월 모임
190806(화) 19시~
@ 시청부근 폴바셋
경인, 새미, 유준, 준원
ⓒ PIRO4D, Pixabay
13장 피터 버거와 실재의 사회적 구성:
인간주의 사회학_하홍규
1. 본문 발췌
우리의 생활은 우리 동시대인들의 어리석은 생각뿐만아니라 몇 세대 죽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에 의해서도 지배되고 있다.
사회학이 학대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신화들의 정체를 폭로함으로써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회학은 폭로를 통해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자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시상 우리가 의심 없이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을 구성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믿음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는 자연적 태도를 갖고 살게 된다.
사회란, 진행 중인 역사적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이 살고 이있며, 또한 인간을 만드는 인간 세계의 부분으로서의 사회이다. 우리 인간들은 실재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우주적 드라마의 창작자임을 망각한 연기자이다.
사회는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과 주관적인 의미들 간의 하나의 변증법, 즉 외부의 실재로 경험하는 것(특히 개인이 직면하는 여러 제도의 세계)과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 간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 것
사회는 객관적 사실성을 가지고 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는 주관적 의미를 표현하는 활동에 의해 확립된다. 두 가지 명제는 모순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이중적 성격을 보여줌, 어느 한 쪽도 다른 한 쪽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다.
현상은 지향성을 통해 성립된다. 이 때 지향성이란 우리의 의식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는 고정되고 불변하는 외적 실재가 아니라, 언제나 지향된 실재이다.
사회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철학자들처럼 '실재가 무엇인가'(존재론적 물음), 그리고 '그 실재를 어떻게 아는가'(인식론적 물음)라고 묻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세계를 원래 그러했던 것으로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사회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본질에 대한 탐구로 들어가기 위해 중지시켰던 바로 그 자연적 태도를 가지고 산다.
자연적 태도는 한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어떤 주관적인 태도나 자세를 말함이 아니고 사회 혹은 세계의 성원들이 다른 타인들과 함께 지니게 되는 자연적 태도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세계 안에서 삶을 살고 있다.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자연적 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실재 감각, 공유하는 시간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버거가 보여주려는 것은 자연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달리 말해서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다가온 세계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된 세계라는 것이다.
사회는 인간의 산물이다, 사회는 객관적인 실재이다, 인간은 사회적 산물이다.
외재화는 인간이 신체적-정신적 활동 속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분출해내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폐쇄된 내재성 안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밖으로 표출하면서, 자신을 위해서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자신을 위한 세계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인간은 동일한 문제를 만날 때마다 매번 어떻게 행해야 할 지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를 수행한다. 즉, 선택의 폭을 줄여 '노력의 경제'를 달성하는 것이다. 제도화의 과정은 인간 행위가 유형화되고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도적 전형은 행위자들의 행위도 전형화하고 그 행위자들의 정체성도 전형화한다. 이른바 '역할'이 바로 인간이 사회에서 갖는 정체성의 전형이다.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의된 유형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도는 통제기제이다.
물화는 인간이 인간 세계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나아가서 생산자인 인간과 그의 산물 사이의 변증법이 의식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상 물화된 세계는 탈인간화된 세계다. 그 세계는 인간에게 생소한 사실성으로, 자신의 생산 활동인 노동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소외의 산물로 경험된다.
사회적 세계는 공교롭게도 개인들에게 매우 육중한 실재로서 경험되기 떄문에, 사람들은 이 세계가 자신들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생활은 창조자가 자신인 것을 잊고 사는 소외의 삶이라 하겠다.
교수형 집행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안에서 죄수를 죽이는 일을 한다. 그는 그 역할 안에서 결코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지만, 타인의 목숨을 앗는 행위를 한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버거는 사회세계를 우리 인간들의 비본래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창조자임을 잊기에 가능하다.
내면화는 객관화된 사회 세계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의식 안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이다. 즉 객관적 세계의 구조가 주관적 의식의 구조로 변형되는 과정이다. 이로써 인간은 사회의 사물이 되는 것이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면화를 통해 타인과 공동의 세계, 즉 상호 주관적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이 물려받음이 바로 내면화인 것이다.
동일시를 통해 사회 세계는 나에게 주관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전유된다 나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객관적 사실성은 내면화를 통해서 이제 주관적 사실성으로, 곧 나에게도 확실하고 견고한 사실성으로 전환된다. 이 때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개인은 그 사회 세계에서 이른바 정상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사회세계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성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다. 인간들에 의해 만들여졌기에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세계이다. 그래서 "사회의 제도들은 우리를 사실상 제약하고 강제하는 한편, 동시에 연극상의 관례, 심지어는 허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사회라는 드라마를 공연하는 연기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드라마를 공연하면서 과거의 연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연극의 관례를 마치 영원한 진리인 양 여긴다. 그러나 사회가 우리를 속박할 때 이는 우리 자신들의 협력과 공모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 인간은 단지 객관적 세계로부터 억압받는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라는 거대한 상직정 세계의 공모자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가 인간들의 드라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들이 '자연적 태도'에서 한발 물러서서 그 당연함을 처로히한다면, 곧 거부할 수 없는 객관적 실재로 경험되었던 것이 사실상 우리가 함께 연출한 드라마인 것이 드러난다면, 그때 에는 이 사회 세계가 주로 자기기만 으로 작동하는 곳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기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앎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이 오히려 인간 자유가 실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각성이 있을 때 인형극은 살아 있는 인간의 무대과 되며, 주어진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가능성의 세계가 된다.
자기기만은 간단하게 말해서 실제로는 자발적인 어떤 것을 필연적이라고 핑계되는 것이다.
자기기만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며, 선택의 고통을 불성실하게 회피하는 것이다.
경험을 감각 경험으로 제한할 때,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도는 훨씬 더 줄어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러므로 때로는 은유가 통쾌한 앎을 선사할 수도 있다. 사회학이 반드시 과학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은 설사 과학적이지 않더라도 경험적일 수 있다
엑스터시(ecstasy): 문자 그대로 사회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례 밖에 서 있거나 또 그밖으로 나가는 행위이다.
사회학자는 사회라는 드라마 가운데서 자신을 발견하고, 줄이 당겨질 때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위치가 사회의 교묘한 끈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연기하는 중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자신을 움직이는 장치를 지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버거는 바로 여기에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과학적인 수단으로는 사회적 행동에서 자유의 문제에 대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떤 사회학자가 되느냐는 과학이 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자 스스로의 선택의 문제이다. 다만 자유로부터 도피하지 않기 위해 선택의 고통도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 이다.
2. 주요키워드
#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
# 외면화, 객관화, 내면화
# 엑스터시
# 사회라는 드라마와 비본래적 실존
3.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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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
“사회는 인간의 산물이다, 사회는 객관적인 실재이다, 인간은 사회적 산물이다.”
피터버거는 사회의 속성을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해한 바로는 객관적 실재는 인간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고, 주관적 경험은 사회 안에서의 인간이 오감을 통해 감각하는 세계에 대한 총체를 말하는 것 같다. 이 두가지 요소로 사회는 구조를 이루고, 사회 내에서 실재와 주관적 경험을 통해 다양한 상호작용이 이뤄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외면화, 객관화, 내면화
버거는 위의 외면화, 객관화, 내면화가 선후 관계없이 변증법적으로 사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외면화는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 객관화는 사회를 만든 인간이 그와는 무관하다고 느끼는 무언가를 실재로서 경험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어렵다. 나랑은 별개로 저게 사실이구나, 저게 맞구나 느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면화는 그러한 사회의 산물을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 것으로 전형화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 엑스터시
“버거가 보여주려는 것은 자연적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달리 말해서 나에게 거부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다가온 세계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된 세계라는 것이다.”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문장으로 사회 내의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대게의 ‘나’가, 사회 내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능동적 존재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꿈꾸게 될수 있는 것 같다. 사회가 고정적이고, 인간은 구성물로서만 존재한다면, 나의 잠재성과 고유성과는 무관하게 정해져 있는 루트에서 속도 이외에는 변화시킬 수 있는게 없다고 느껴진다. 사회변화를 추구할 때도, 구조에서 요구되어지는 자격을 취득해야만이 권력자로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만같은 프레임이 갇히게 되는 것 같다. 그런 건 참으로 숨이 막힌다. 하지만 버거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에 의해 구성된 세계라고 말한다.
# 사회라는 드라마와 비본래적 실존
사회가 규정지어놓은 루트에서 벗어날 때 짜릿함을 느낀다. 해방감과 살아있다는 느낌을 느낀다. 가령, ‘~해야 착한 사람이지’라는 말을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이 들어왔는데, 역할을 덧씌우는 것 같아 기분이 항상 나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가 왜? 꺼져”라는 내면의 깊숙한 플로우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집을 나왔을 때 나에게 덧씌워진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면서 짜릿한 해방감과 살아있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꼈던 기억이 난다.
칼 로저스는 상담에서 비본래적 실존을 이야기 했다, 이마를 딱 치며 그에게 푹 빠져들게 되었는데, 비본래적 실존이라함은 내가 이해한 바로는,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 같다. 나답게 산다는건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는 것, 외부세계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걸 말한다. 타자를 해하는 것이라면 제재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와 사회의 경계를 확인해나가고 있는게 어쩌면 내 삶과 유사한 것 같다.
연기를 그만두면, 약속을 어기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생각될까봐 두렵다. 두려움에 억압되어, 삶이 무기력해지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순간의 엑스터시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연기를 그만두고 나의 세계를 내가 주체가 되어 구성해나갈 때, 피터 버거가 말한 자유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사람들과 나눠보며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다.
4. 기타
경주마/박노해
너는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
어느 날부터 경주마로 길러지고
너는 지금 트랙을 달리고 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좋은 사료를 먹고 좋은 기수를 만나
레이스에 앞서는 게 아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결국
트랙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