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해봄] 프랑스현대철학_가다머 해석과 진리

낭만민네이션
2021-08-03
조회수 127

20190414_철학해봄
처음읽는 독일현대철학_게오르그가다머
철학아카데미_박남희



처음읽는 시리즈 독일편



들어가기

가다머에게 철학함이란 단순한 지식학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신을 실현해가는 실처학을 의미한다. 이는 곧 달리 이해하며 자기를 실현하는 해석학이어야 함을 말한다.
가다머의 고민은 ‘사람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는가?’이다. 이러한 물음을 해명하기 위해서 가다머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깊은 연구들을 진행한다.

가다머는 마르브르크에서 주로 활동하며 마르부르크학파라고 불리는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과 깊은 친분을 쌓는다. 또한 신칸트학파와도 활동을 같이 하게 되는데, 신칸트학파는 ‘우리는 사물 자체는 알지 못하고 단지 그 현상만을 알 뿐이라’라고 말하면서 칸트에게로 돌아가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인간 이성의 전통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하려는 철학사조를 이어가는 학자들을 일컫는다. 실제로 가다머는 1922년 신칸트학파인 나토르프의 지하하에서 박사학위 논문인 ‘플라톤의 대화에 있어서의 기쁨의 본질’을 쓴다.

결정적으로 프라이브르크 대학에서 후설의 조교였던 하이데거와의 만남으로 철학의 새로운 길을 열게 된다. 신칸트학파가 가지고 있던 날카로운 논증을 넘어서 하이데거에게서 5년간 지도를 받으며 1929년 교수자격논문인 ‘플라톤의 변증법적 윤리학, 필레보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을 쓴다. 그리고 곧 하이데거를 넘어서서 해석학을 존재론의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1946년에는 하이데거의 후임으로 프라이브르크 총장으로 취임하게 되는데 이때 연설에서 ‘사물에 대한 객관성,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성, 타자에 대한 관용성’등은 하이데거가 다룬 근로봉사, 국방봉사, 학문봉사와 비교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화자된다.

그리고 그가 60세가 되던 해에 ‘진리와 방법’을 펴내며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다. 이때가 야스퍼스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긴 후의 일이였다.

 






진리, 방법

그동안 우리는 도구적 이성이 추구하는 방법을 진리로 삼았으나, 진리는 무엇이 아닌 늘 달리하며 있는 이해 운동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1부에서는 예술경험, 2부에서는 정신과학, 3부에서는 언어문제를 다루고 있다.

1부에서는 예술 경험을 다루는 이유는 자신이 진행할 진리의 문제를 예술에서 어떻게 경험으로 문제로 다루어왔는지를 보고 서양 사유가 철학사 안에서 진리를 어떤 식으로 보고 있었는지를 논하려고 한다. 나선적인 구조로 책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방법과 구별만을 다루는 협소학 학문적 영역으로 좁혀진 정신과학보다는 예술의 만듦이 열어주는 동시성과 정체성의 차원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새로운 진리경험을 보다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를 위해 근대철학이 지향하는 주-객의 대립관계를 폐기하고, 실재서잉 아닌 사실성의 지평에서 진리란, 분리할 수 없는 삶의 연관 안에서 나와 함께 일어나는 살이 있는 ‘이해의 운동’이라고 보며 이를 ‘실현의 진리’로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이러한 정신에서의 작용들이 어떻게 언어 안에서 이해되고 발현되는가를 다루고 있다.



이해, 존재론적 해석학

가다머는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과 나치의 출현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문제 즉 과학기술의 전횡, 인종차별, 자본주의 폐단, 정치적인 맹신, 이데올로기의 갈등, 사회와 개인의 문제가 생겨난 근본원인을 찾아서 서양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데카르트의 사유의 방법론에서 시작한다고 믿는 가다머는 데카르트의 사유는 현실의 생생한 삶을 배제한 이론적 지식으로 전략됨으로 이성을 도구화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도구적 이성이 진리하는 이름으로 절대화되면서 동일성의 존리로 작동하고 이에 근거한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달하게 됨으로 과학문명에 환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념을 보다 강화해 가면서 자신을 절대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역사속에서 진정한 이성의 이러한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교양, 공통감각, 판단력, 취미’에서 그 답을 찾는다. 또한 중세의 신비주의 전통까지 가서 도구화된 이성과는 다른 방식의 현실성 안에 살아 움직이는 사유와 전체성을 만난다.

그리고는 고대의 이성의 전통을 다시 중세와 근대를 관통해 오면서 근대 이성과 다른 새로운 개념인 ‘이해’를 찾아낸다.

가다머는 ‘이해’를 지식을 구하는 인식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새롭게 구하고 있다. 이성을 오성, 감성과 구별된 육체된 분리된 정신 이런 체계 위에 올려놓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존재라고 말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란 모든 것을 마주하여 하나로 융합하면서 자기자신을 있게 만드는 전체성의 지평이다.


이해, 운동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의 운동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달리하는 것으로 나보다 앞서 있는 모든 것들을 지금 당면한 문제와 더불어 하나로 융합하면서 늘 달리 새롭게 자기 자신을 실현해 간다. 이것을 지평융합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해의 운동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이해의 운동의 결과를 진리로 여기면서 그것에 맹종하는 것이다. 결국 진리는 방법이지 그 자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리라는 것은 현실에서 어떤 이가 지평융합을 해서 나름으로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받아들여서 진리로 여길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에게 그 결과가 나의 지평에 어떻게 융합될 것인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다머는 진리란 무엇이 아닌 늘 달리 유동하는 이해의 운동 그 자체로 이해의 운동은 실체적이지도 실재하지도 않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시대마다 등장했던 진리는 실제로는 진리가 아니라 공유된 이해일 뿐이다.


이해, 해석

가다머는 이러한 이해의 문제를 ‘적용’의 문제와 연관시키면서 ‘해석’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에 따르면 이해와 적용과 해석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 안에서 일어나는 동시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해-적용-해석’은 하나이다.

이해는 언제나 이미 적용이며, 적용은 또한 해석이다. 이해는 언제나 적용이자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철학이 이해와 적용과 해석을 분리해서 봤다면 가다머는 이 셋이 해석학적 과정에서 함께하는 성립요소라고 말한다. 적용은 모든 이해를 종합하는 계기이다.

하버마스와의 논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버마스가 우리가 무엇을 알고 난 후에 비판적 사고에 따라 그것을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했지만, 가다머는 무엇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지식적 차원에서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체가 그것을 이미 적용시키면서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해와 적용과 해석은 그렇기에 앎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생성해 나오는 삶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가다머와 달리 우리가 무엇을 알고 판단한 후에 이를 적용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가다머는 이해란 단지 무엇을 알고 모르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나의 전체가 세계과 만나는 전인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판단력과 시대의 가치와 나의 지향성이 하나로 있는 지극히 윤리적인 일로 이해는 책임이 동반된 자기 존재 생성의 일이다.


이해, 경험

가다머가 말하는 경험은 어떤 특정한 무엇을 내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 내가 참여함으로 그것과 하나가 되는 만남과 같은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경험한다는 것은 앎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몯느 것을 같이한느 존재적인 차원을 지시한다. 이는 이해의 운동과 같이 삶이란 본래 분리될 수 있는 것이아니라 전체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성, 한계

어떤 이론으로도 우리 삶의 전체성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 순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말해지지 못하는 한계 속에서 우리는 늘 달리 사유하고 이해하며 적용하며,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가다머가 독일 낭만주의 전통에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의 계몽주의가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서 출발한다면 독일 낭만주의는 이와 달리 이성의 불완전성, 그 한계를 절감하는 데 있다. 이것은 멀리 중세의 신비주의 전통과 연결되며 고대의 수사학적 전통과도 연결된다.

가다머가 이야기한 한계에 대해서 해석학 안에서도 반대가 많았고, 계몽주의 계통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가다머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이성과 소크라테스의 앎에 대한 이해와 일맥상통한다. 곧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아는 것이 삶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존재 언어, 놀이 대화

가다머는 이와 같은 진리의 문제를 언어, 놀이, 대화로 이야기한다. 이해의 운동이 객관과 주관 어느쪽으로 쏠리지 않고 온전히 융합될 수 있는 단서는 바로 놀이와 대화이다.

먼저 가다머는 언어를 단순히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나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내지는 방법으로 여기지 않고 존재론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언어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나 기호만이 아닌, 그 시대 공동체의 가치와 더불어 말하는 사람의 생각과 습관깢디ㅗ 그대로 담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이며 존재론적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가지는 역사와 전통 안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이해하면서 있고, 이를 언어 안에서 사유와 존재의 융합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다머는 ‘이해되어 질 수 있는 존재는 언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면에서 언어는 단순한 언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성을 말해준다. 언어는 정확히 사용하고 기억하며 전달, 학습되어야 하는 것, 그래서 사실이 진위여부를 가리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하는게 아니라 공동체의 가치와 개인의 경험을 하나로 담아가는, 언제나 다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한다.

가다머는 글자는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는 음성, 자연현상, 태도, 표정, 옷차림, 음색 톤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언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언어로 사유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사유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들은 모두 언어라고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유하는 사람에게 언어 밖의 세계란 없다.


언어, 사유

사유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내적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자신과 나누는 내적 대화인 사유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자신을 새롭게 하는 하는 일이다. 사람은 언어로 사유하며 언어를 토해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 존재이다. 또하 ㄴ언어를 매개로 타자와 만나고 대화하며 이전과 달리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존재이다.



해봄, 생각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동물이면서 생각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동물이 되어서 다른 류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인류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내일을 기대할 수 있으면서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인간이라서 할 수 있는 일과 인간이라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해석학의 과제이다. 우리의 활동, 존재, 사건, 상황을 해석하고 그 나름의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바로 해석학의 일이다. 이러한 해석학의 범주는 나, 사회, 국가에서부터 역사, 시간, 신과 같은 범주까지 퍼져 나간다.

지평융합은 다른 이와 나의 융합이기도 하지만, 시간 위의 존재인 인간의 개인의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지평융합을 통해서 우리는 같은 선상에서 해석하고 생각하고 이해하게 된다. 다른 이들의 생각을 생각하는 단계에서 지평융합의 시작을 볼 수 있다.

폴 리쾨르가 말하는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은 이렇게 자신을 해석하는 것이 바로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진리와 방법’ 3장에서 언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여기에 속할 수도 있다.

데카르트부터 시작한다. 생각과 현실을 나누는 분할과 생성은 그것 자체로는 창의적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이 실제로 현실을 분할해서 인식하게 만듦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뇌구조를 바꾸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도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다.

가다머의 철학 안에서는 헤겔의 빌둥(교양’의 개념도 나오고 칸트의 오성과 판단력의 개념도 나온다. 또한 하이데어의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시간의 개념도 사용한다. 이 모든 것들을 해석학적 선상에서 ‘이해’라는 것으로 융합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연결되면서도 여러 사람들과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다머에게 진리는 해석이다. 그리고 해석한 만큼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그 시대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이해는 누구나 다른 차원에서 다른 시간에서, 다른 상황을 맞닥드리기 때문에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해는 각자의 해석학의 영역에 있다. 지평융합을 통해서 이해는 이전의 이해와 서로 결합한다. 우리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지평융합의 과정이면서 서로의 이해가 만나는 장이기도 하다.





해봄, 존재

가다머는 자기자신과 이해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 안에서 파악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달리 존재한다. 이해를 달리함으로 존재도 달리한다. 사람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저바다 처한 현실이 다르며 이해도 달라진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존재도 달리하는 것이다. 이해란 단순히 지식을 구하는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존재론적 문제인 것이다. 이해는 곧 존재함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해석의 문제를 다룸으로 철학은 곧 해석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험이란 것은 존재론적으로 볼 때 그 시간대에 같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 장소, 그 시간, 그 사람들과만 나눌 수 있는 경험은 곧 다른 이들의 대한 지평융합이면서 그 전까지 내려오는 역사의 융합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험은 전해지지 않고 오직 그 순간에 이해로 자신의 삶에 적용된다.


해봄, 고민

어느날 문득, 내가 움직이고 있는 자동차가 나에게는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과분하다고 하기 보다는 내가 이것을 소유한다는 것이나 움직이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리고 자동차 안에 들어 있으면 나만의 공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게 되었고, 나 자신이 자동차와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시간 위의 존재인 인간은 자신과 공유하고 있는 시간 속의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산다. 그런데 그 공유된 시간 속에서 내가 소유하고 움직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자신과 동일시 되면서 결국은 자신이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더 커 보이고 더 멎져 보이고 더 있어 보인다고 느끼게 된다. 여기서 바로 다른 사람과 비교에 의해서 우위를 점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포착된다. 매번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산다. 그리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자신이 우위에, 먼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정치적인 속성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다른 이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로서 소유와 기술을 이용하고, 자신이 가진 무엇인가로 움직이고 싶어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가다머는 이것이 심각하게 발전하게 되면 국가사상으로 나타나는 ‘나치’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정신의 분할은 군부독재와 개발독재 시대때 발전한 기술과 분할된 사고체계가 가지고 온 폐단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정도가 심하면 나치지만 그 정도가 낮으면 독재가 될 테니깐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그럼 어떻게 이 세상을 바꿀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데카르트의 함정을 넘어서도록 도와줄 것인가? 이런 고민이 든다.

글을 쓰면 제목을 항상 ‘무엇과 무엇’으로 연결하는 버릇이 있다. 항상 생각은 두가지 이상이 결햅해서 생긴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어떤 상황에 대한 이해와, 어떤 개념에 대한 이해들은 하나가 되어서 연결어 and로 이어진다. 그리고 거대한 세계가 연결되면서는 새로운 지평이 일어난다. 나는 이것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이제 내갸 해야할 것은 나의 깨달음과 삶이 연결되는 이해, 지평융합이다. 나는 어떻게 삶에 적용할 것인가?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