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해봄] 비혁명의 시대_지젝과 니클라우

낭만민네이션
202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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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혁명의 시대를 읽고 있다. 혁명이 혁명으로 존재할 수 없는 시대가 비혁명의 시대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종식에 따른 전략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종식하게 되었을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이상은 정말로 1990년의 소련의 붕괴로 소멸해 버렸는가? 아니면 실체를 잃어 버리고 영혼만 떠돌아 다니는 유령으로 계속해서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가? 오늘은 이러한 논쟁의 세계적인 흐름을 알아본다. 라클라우스와 지젝의 논의를 통해서 이데올로기가 소멸한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 요지는 라클라우스는 알튀세르에 의한 '경제의 본질적인 생산관계'라는 설정자체가 '동일성의 차원'에서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지젝은 그러한 동일성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계급의 관점에서 정체성이 형성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논쟁이기는 하지만 매우 호흡을 가다듬고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대부분의 논의는 김정한의 '비혁명의 시대'에서 발췌하였고 중간중간 나의 생각과 깨달음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서 한국사회에서 노동운동을 포함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나 새로운 운동의 방향들을 알아보면 좋겠다. 이를 통해서 제도와 다르게 '운동'의 성격에서 사회적으로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하고, 어떤 것들 목표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볼 것이다.



이분이 바로 지젝



현재까지 라클라우와 지젝의 논쟁은 다음과 같은 서적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1) 라클라우 : 우리 시대의 혁명에 대한 새로운 성찰(1990)을 통해 새로운 이론적 대안 제시

2) 라클라우 :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3) 지젝 : 헤게모니 동일성에 대한 비판

4) 라쿨라우의 헤게모니 전략에 대한 지젝의 비판 숭요

5)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2000)을 통한 라클라우와 지젝의 논쟁

6) 인민민주주의 이성(2005)를 둘러싼 라클라우와 지젝의 비판과 재비판

7) '적대성' 개념에서 나타나는 차별성과 정체성 논쟁

8) 알튀세르에 대한 해석


사회적 실재와 실재의 적대


포스트마르크스주의보다 급진민주주의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라클라우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제시한 핵심표어는 :반본질주의'이다. 반본질주의는 antiessentialism이라고 부른다. 라클라우는 구좌파들이 정세 변화를 따라 가지 못한 채 이론적, 실천적으로 무능력한 이유가 본질주의에 있다고 비판했다. 본질주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어떤 한 요소를 나머지 모든 요소들의 본질로 상정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이야기하면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지만 그런 요인들을 불러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근본원인을 밝혀내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다. 라클라우는 이러한 본질주의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전략을 다시 해석한다.


본질주의에 빠진 구좌파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1) 노동계급이 상회변동의 근본적 추진력을 담지하는 특권적 행위자라는 계급주의를 가진다.

2) 국가의 역할 확대가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이라는 국가주의에 빠져 있다.

3) 성공적인 경제전략이 피료하 정치적 효괄ㄹ 보장한다는 경제주의를 표방한다.

4) 사회를 합리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권력이 필요하다는 자코뱅적 혁명관을 고수한다.


그러나 다양한 사회운동들 중에서 노동자운동이 선험적인 우위에 있지는 않으며, 다양한 정치적 주체들 중에서 노동계급이 선험적인 특권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우연적이다. 이는 경제가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필연적으로 결정하는 본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는 서로 동등하게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과정에 참여하며, 최종심급에서 경제가 모든 것을 단순 결정하는 고독한 순간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또한 국가권력을 장악한 뒤 중앙집권적으로 위로부터 사회를 변혁하는 '기동적'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는 지속적인 민주화과정, 곧 '진지전'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연적이다.


적대antagonism도 마찬가지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적대는 생산관계에 위치한다. 자본주의에서 적대는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계급관계이고 이로부터 계급적대가 발생한다. 통상적인 오해와 달리, 라클라우와 무페가 계급적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자본주의에는 계급적대가 존재한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생간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적대가 발생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적대는 생산관계에 내적이지 않다. 이는 라클라우와 무폐가 무엇보다 적대는 객관화 할 수 있는 실재적 대립(칸트)이나 모순(헤겔)과는 다르다.


모순의 경우에는 a는 완전하게 a이기 때문에 not-a라고 하면 모순이다. 따라서 불가능하다. 실재적 대립의 경우에는 a는 또한 완전하게 a이기 때문에 a와 b의 고나계는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효과를 산출한다. 그러나 적대의 경우에, 우리는 상이한 상황에 직면한다. '타자'의 현존은 내가 총체적으로 나 자신이 되지 못하게 지지한다. 이 관계는 완전한 총체성들이 아니라 총체성들의 구성 불가능성에서 발행한다. 적대가 있는 한, 나는 나 자신의 완전한 현존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적대하는 힘 또한 완전한 현존일 수 없다.  그 객관적인 존재는 나의 비존재not-being의 상징이며, 이런 식으로 그것의 존재를 완전한 실정성positivity으로 고정되지 못하게 지지하는 복수의 의미들이 흘러넘친다. 실재적 대립은 사물들 사이에 객관적 관계이다. (규정할 수 있는, 정의할 수 있는)

모순도 똑같은 개념들 사이의 정의할 수 있는 관계이다. 적대는 부분적이고 불안정한 객고나화를 드러내는 모든 객관성의 한계를 구성한다. 언어가 차이의 체계라면, 적대는 차이의 부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적대는 언어의 한계에 위치하며, 언어의 파열로서, 즉 은유로서만 실존할 수 있을 뿐이다.  


나를 나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적대이다. 적대는 나의 완전한 동일성을 가로막는 외적 타자의 현존이다. 외적 타자로 인해 간의 완전한 동일성의 실현에 방해받을 때, 나의 불완전성의 원인이 외적 타자에게 향해질 때 적대가 발생한다. 이런 적대 개념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칼슈미트에 따라서 동지와 적, 우리와 그들의 명확한 구별이다. 따라서 적대관계에서 나와 우리는 자신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외적타자, 외부의 적을 제거해야 한다.


요컨대 적대는 동일성의 부재이다. 즉, negation이다. 이런 적대는 생산관계와 내적 필연성이 없다. 동일성은 생산관계가 아니라 담론 내의 주체위치subject position에 대한 동일화identification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그 자체로 적대적이지 않으며, 노동자가 계급적 담론 내의 계급적 주체 위치와 자신을 동일화할 때 적대가 발생한다. p 202


하지만 담론이 복수로 존재하듯이 주체 위치 또한 복수로 존재한다. 알튀세르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동일성은 여러주체 위치들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내가 어떤 주체 위치와 동일화하느냐하는 것은 여러 담론들의 절합에 달려 잇으며, 특히 적대를 형성시키는 담론들의 절합이 헤게모니적 실천이다. 헤게모니적 실천은 다원적인 동일성들을 등가연쇄로 묶어내는 것이며, 등가연쇄가 창출될 때 동일성들의 변별적 성격은 붕괴한다.


아이들을 가로질러 등가를 확립하는 적대가 차이의 실패이자 언어의 파열인 이유도 여기 있다. 적대관계의 두 항은 서로 상이한 담론, 상이한 주체 위치에 관계하고 있다. 따라서 언어의 개고간성, 객관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대는 객관성의 한계이다. 이는 또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중립적인 총체화된 사회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라클라우와 무페




지젝의 비평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적대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항의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나 자신의 동일성을 획득하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다. 이미 모든 동일성은 본래 가로막혀 있으며, 불가능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외부의 적은 단순히 작은 조각, 우리가 그런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불가능성을 '투사'하거나 '외화'하는 현실의 잔여물이다_지젝


라클라우와 무페는 적대를 외적 분할로 파악했지만, 지젝은 그것을 내적 분할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적대는 동일성의 부정이 아니라, 부정된 동일성의 부정으로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괴델의 불확전성의 원리에 의하면 오류가 없는 시스템은 오류가 무엇인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오류가 있어야 오류가 무엇인지 알게된다. 적대가 동일성의 문제라고 하고 빈공간에 인민이 들어온다고 할께, 적대하는 대상의 일부가 내 안에 있아야 적대라는 개념이 생긴다는 것이다. 적대를 규정하는 순간, 적대는 내 안에 있다.






질문과 공감


1. 1991년 5월 이전에는 어떻게 운동이 가능했는가?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91년에는 왜 만들어내지 못했는가? 그리고 30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어떤 변화를 꿈꾸어야 하는가? 제대로된 '연대'가 가능했다는 것은 '연대'에 대한 보편성이 이미 내재하고 그것을 우리가 잃어 버렸기 때문에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정상화 패러다임'이 된다. 반대로 이제는 새로운 시대로 넘어갔고 우리는 이전에 생각했던 '연대'는 아예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진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


1991년 이후에 사회의 주요한 변화의 흐름은 '복잡성'이 아닌가? 이전까지는 민주주의와 군사정부를 선택하는 문제였던 것일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오히려 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우리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우리가 선택의 주체가 되기는 했지만 거대한 세상과 연결은 느슨해지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문화적인 요소'는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해봄, 생각



역사적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연계되면 다양한 변이를 맞이게하게 된다. 역사는 자연적으로 원시사회와 봉건사회,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인 유물론의 방식이 변증법으로 돌아오면서 다양한 분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른바 '다층적 변환' multi transformation이 일어나는 것이다. 시민조직의 창출과 다양성의 분화, 의회민주주의의 대안적 성격으로의 격상, 복지국가론의 등장과 국가재정의 문제 등 해결해야할 혹은 변화를 받아들여야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조직마다, 모임마다, 체제마다 각기다른 시간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역사적 제도주의는 오히려 더욱 효용성을 가졌다.


이전에는 세계를 중심으로 거대담론들의 세계였다면 그에 따른 세계전체를 바꾸려는 차원에서 역사적 유물론이 유효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이라는 변증법적 도전은 '정'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반'인 포스트모더니즘이 만나면서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자유주의와 같은 변이를 만들어 왔다. 그에 따라 실제적인 운동의 방식도 다양한 경로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현실적으로는 복지국가 논의와 증세, 무상급식, 차별과 혐오에 대한 정책, 탈원전과 환경보전과 같은 주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은 언제나 이론과 합리성의 기반에서 예상이 되었지만, '반'은 변주곡과 파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복잡성을 관리하지 못하는 결과는 비혁명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1991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응한 운동의 변화는 구조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포스트 구조주의로 가는가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포스트 자유주의로 나누어지게 된다. 인간과 세계의 연결에서 어떤 것을 중심으로 보는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에서 어떤 부분이 더 유효한가의 문제가 등장하고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방법론의 변화로 오면서 다양한 주체들로 분화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현실인식 논의가 애매하게 된 것이고 그에 따른 대안도 엉성한 형태로 분할되어 버린 것이다.





전략과 전술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전술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네그리와 하트가어셈블리에서 말하는 전략과 전술을 바꾸어서 활동가들이 전략을 만들고 전술은 리더들이 실행하도록 만드는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전략과 전술에 있어서 역량의 문제도 생긴다. 우리가 역량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실패를 경험했다면 그것은 크게 보면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량을 만들어가지도 않고 전략도 없는 상태에서 시간만 지나왔다면 그것은 정말 보완하기 힘든 실패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해석학의 영역에서는 얼마든지 해석을 통해서 과거를 부활시킬 수 있기는 하다.


운동의 방식은 다시 메타담론으로 돌아가는 '정상화 패러다임'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진보의 패러다임'인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오버래핑 컨센서스가 일어나는 이유는 '의미와 흥미'가 우연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민활동을 연구하고 셋팅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방법론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롤스가 말하는 서로 관심사가 겹치는 부분을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라고 부른다. 우리는 활동가가 필요하고 활동가를 보호하고 양성해야 한다는 '정상화패러다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새로운 방식인 '활동가 없는 조직'으로 일반적으로 일을 하다가 필요한 시기에 우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조직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진보패러다임'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일반시민들이 더 쉽고 편하게 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


비혁명의 시대에 우리는 혁명이 아닌 혁신을 논의하고 있다. 혁신이 일시적인 어떤 우연성에 기인하는 것처런,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꾸준한 필연이 축적되어야 한다. 그것은 전략과 전술을 넘어서는 '정책과 제도'에 관한 것이다. 꾸준한 정책과 제도의 개발과 함께 순간순간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운동들이 연관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들을 셋팅하고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이런 정교한 차이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방법론을 고안해야 하는 것이다.


전략과 전술에만 치중하다가 정책이 없는 상황이 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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